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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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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은 끝났다

[기고] '인정 투쟁'이 끝난 시대, '동정 투쟁'의 세대론

지금 한국 사회에 세대론은 존재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부터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때마침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펴냄)를 읽고 이러한 생각을 굳히게 됐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88만원 세대'에서 '삼포 세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대 담론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것들은 세대론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런 것들은 세대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세대론은 세대론이되, '세대론의 종언 이후의 세대론'이다.

일반적으로 세대론은 근대적 시간관의 산물로 여겨진다. 근대적 시간관은 전통적인 순환적 시간관과 다르게 직선적이다. 직선적 시간관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 놓지만, 이러한 전망은 탁 트인 바다와 같은 무한한 지평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telos)으로 수렴된다.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민족국가(nation state), 근대화(modernization)와 같은 이념들은 대표적인 근대의 소실점이다. 진보란 이러한 근대의 소실점을 향해 가는 운동을 일컫는다. 그것은 이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근대적 시간 의식에 내재한 벡터의 발현이다.

세대교체론적 세대론

미래의 전망을 성취하기 위해 진보하는 행위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젊음은 특권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젊음은 새로운 것이고 자체로 이미 미래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움'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그것은 단지 시간적 선후를 의미할 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근대의 신화 속에서 '새로움'은 곧 진보와 동일시된다. 젊은 세대가 늘 새로운 세대임을 자처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율적인 근대화의 실패로 식민 지배를 겪은 이래 근대화는 민족사적 사명이 되었으니, 젊은 세대의 어깨에 지워진 역사적 책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젊은 세대는 이 무거운 짐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여 그들은 전근대적 습속에 포박된 기성세대를 밀어내고, 근대라는 새로운 이상을 이 땅에 도래시킬 '장강의 뒷 물결'을 자처했다. 가령 식민지 조선에서 새로운 근대 문학을 정초하려했던 이광수는 "선조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오토에 강림한 신종족"을 자처했던 바, 여기서 과거에 대한 급격한 단절에의 욕망과 신생을 도모하는 주체로서의 자기호명의 의지가 과장되게 표출되고 있음은 이미 수차 지적된 바 있다. 자신들의 세대의식을 '화전민 의식'으로 특칭하며 기성세대라는 우상을 파괴할 것을 외쳤던 이어령이나 "태초와 같은 어둠 속"에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의지를 벼렸던 <산문시대>의 김승옥, 그리고 "이어받은 문학적 전통이 태무"하다며 전통과 단절된 지점에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갈고 닦을 것을 역설했던 백낙청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흥미로운 것은 5.16 쿠데타 역시 이러한 세대 교체의 필요성을 적극 대두시키며 등장했다는 점이다. 쿠데타 세력은 지나간 모든 것을 '구악(舊惡)'으로 치부하고 그 악을 척결하는 '청신(淸新)'한 세대로 자신들을 호명하는 전형적인 세대론적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 5.16 쿠데타는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가장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세대교체론이기도 했던 것이다.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이렇게 세대론은 늘 세대교체론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세대론적 인정투쟁을 동반했다. 거기에는 자신들이 미래에의 전망과 소실점을 향해 가는 진취적인 세대라는 나름의 자신감과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 넘쳐나는 세대론은 이러한 의미의 세대론과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세대교체라는 문제 틀이 소거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양상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세대론의 담론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세대론 자체가 끝났음을 직감하게 한다.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자 미래의 이상을 현실로 도래시킬 주체로 자임하지 않거니와, 기성세대 역시 젊은 세대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아비를 살해하는 대신 아비를 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기로 타협한 젊음이 기성세대를 밀어내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비전으로 사회를 설계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을 리 없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이러한 거세된 젊음에 대해, 아비를 살해하기보다는 그 아비의 품 안에서 혹 내게 떨어질지도 모를 떡고물을 기대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는 20대들의 삶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딱 하나 건질 게,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사이의 인정투쟁이 이미 끝나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인정 투쟁'이 끝난 시대, 세대론적 '동정 투쟁'

끝나버린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세대론적 동정(同情)투쟁이다. 젊은 세대는 더는 위험하지 않다. 단지 불쌍할 뿐이다. 이제 관건은 젊은 세대가 얼마나 새롭고 진보적인 세대인지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확인받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서 힘들고 괴롭다는 젊은 세대들의 아우성이 울려 퍼지면 멘토들은 이들을 위로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결과 기성 사회와 세력을 대표하는 멘토들은 투쟁과 극복의 타깃(target)이 아니라 따스한 위로와 동정(sympathy)을 얻어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세대 간의 인정투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곧 종언 이후의 세대론을 구성하는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역사의 종언' 이후에 성장한 세대라는 점과 관련되는 듯하다. 그들은 현재의 질서와 경합하는 대안적인 전망을 소실점으로 가져본 일이 없다. 자신들의 손으로 성취해야 할 역사적 목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이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세대"(한유주)인 것이다. 혹자는 그래도 아직 '민족통일'이라는 과업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지도 모르나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근대적 소실점이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중력으로 작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역사적 소실점이 상실된 이후의 삶을 '동물'과 '속물'로 일별해 고찰한 사람은 코제브였다.

따라서 이 책이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괴물'이 된 이유를 자기계발 담론에서 찾고 그 허구성을 논박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렸다. 자기계발 담론은 그것 말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받아본 적 없는 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세대'라는 말은 틀렸다. 그들은 아직 하나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자기계발 담론이 쇠퇴하고 '힐링' 담론이나 여타의 다른 담론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더라도 상황은 크게 바뀌기 어렵다. 진짜 문제는 작금의 현실을 상대화해서 볼 수 있는 전망의 지평이 무너져 버린 데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의 무의식을 해부해보면 아마도 '대안은 없다'라는 저 유명한 대처의 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언 이후의 삶은 이곳에서 한층 더 비극적으로 펼쳐진다.

대학생은 '진보적'이어야 하는가?

물론 앞으로도 불쌍한 젊은 세대의 현실을 들춰내고 그에 대한 처방을 조제하는 담론은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이 책처럼 젊은 세대가 단지 불쌍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식의 이야기도 흘러나올 것이다. 그것들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 말들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 순간에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필자처럼 대학생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낡은 믿음에 포박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통탄스러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통탄스러운 것은 여전히 그러한 허구적 믿음을 '진보'와 동일시하며 그 잣대로 젊은 세대의 행태를 분석하는 안일한 정신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세대론이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보적이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혼자 실망해 경악하는 행태를 버릴 수 있다. "세대론에 입각한 청년론이 무용"(소영현)해졌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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