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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 따뜻하고 아름다운 남쪽섬...보길도와 청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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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새해 특집^^ 따뜻하고 아름다운 남쪽섬...보길도와 청산도"

[인문학습원] 1월의 섬학교 참가 안내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2014년 첫 번째 섬여행은 제23강으로 새해 아침 남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섬 보길도와 청산도를 찾아갑니다. 1월 3일(금)부터 5(일)까지 2박3일의 새해맞이 특집입니다. 겨울이라 춥지 않을까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남도의 섬들은 겨울이야말로 걷기에 제격입니다. 보길도와 청산도는 보통 서울보다 10도 이상 따뜻합니다. 그래서 배추와 상추, 마늘과 시금치가 한 겨울 노지에서 자라고 동백꽃도 피는 것이지요.

▲새해 아침...보길도의 비경이 시작된다. 보옥리 공룡알해변 풍경 Ⓒ섬학교

보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보길도를 제대로 보고 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동차를 타고 이정표를 따라 정해진 코스만을 돌다 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보길도 답사는 보길도의 숨겨진 비경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보길도에는 보길도 사람도 잘 모르는 숨겨진 비경이 많습니다. 도치미끝도 그중 한 곳입니다. 왕복 4킬로미터를 바다와 섬들만을 보고 걷을 수 있는 도치미끝. 도치미끝은 도끼날 끝이란 뜻의 절벽인데, 도치미끝에 서면 그 환상적인 풍경 앞에 숨이 탁 멎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대한팔경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 부용리 마을의 진짜 겨울 동백숲도 탐방합니다. 보길도는 특히 강제윤 교장선생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보길도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이지요.

청산도를 다녀온 사람 또한 많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채꽃 피고 청보리 자란 봄에 갑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등살에 청산도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보기 어렵습니다. 청산도는 겨울에 가야만 한가롭고 호젓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청산도 슬로길 전체를 전세 내서 걷는 행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 따뜻한 남쪽 섬으로 떠나볼까요.

▲도치미끝 절벽에 서면 환상처럼 펼쳐지는 보길도 바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4년 새해맞이 답사지인 보길도와 청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보길도]

낙원으로 떠나는 여행

보길도는 천상 낙원입니다. 전남보건환경연구원 대기보전과에서 2013년 초부터 10개월간 보길도의 공기질(空氣質)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보길도의 산소음이온은 cc당(최대값) 1천421개로 나타났습니다. 음이온은 공기를 정화하고 인체의 자율신경계를 조절한다 합니다. 공기의 비타민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차량 통행이 많은 도시지역의 경우 0~200개에 불과하니 대단한 수치입니다.

산림 치유물질인 피톤치드를 사람이 마실 경우 스트레스와 긴장이 풀리고 혈압이 안정되며 면역기능이 강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피톤치드 최대농도 또한 보길도에서는 608pptv로 조사됐습니다. 섬 전체가 삼림욕장이란는 뜻이지요. 또 보길도에서 미세먼지 농도는 0.039로 대기환경기준 0.1㎎/㎥의 39%에 불과했습니다. 보길도는 그 자체로 분명 건강과 치유의 섬이지요.

보길도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보길도 사람들은 그런 땅을 '안태(안투)고향'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태를 묻은 고향이란 뜻이지요. 유년시절을 보내고 뭍으로 나가 살다가 어른이 된 뒤 귀향하여 산 시간까지 합하면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보길도 구석구석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다시 고향을 떠나 유랑자로 살지만 여전히 보길도는 내 삶의 뿌리가 되는 섬입니다.

고향은 아니었으나 나보다 수백 년을 앞서 보길도에서 살다간 시인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선생입니다. <어부사시사>나 <오우가> 등의 시가와 한국의 3대 정원 중 하나라는 부용동 원림을 만든 이가 바로 고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길도를 고산의 유배지로 기억하지만 보길도는 그의 유배지가 아니었습니다. 보길도는 고산의 은둔지이고, 고산의 왕국이었습니다. 보길도 전체가 고산의 장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 중 유희 공간인 세연지와 세연정, 왼편 큰 바위가 혹약암이다 Ⓒ섬학교

고산의 주된 주거지는 본처와 자식들이 있는 해남 녹우당이었고 보길도의 집들은 첩실과 그 자식들이 기거하는 집이었으며 고산의 별장이었습니다. 고산은 부용동 원림을 건축하고 7번을 드나들며 13년이란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1671년 85세로 보길도에서 숨을 거두었을 정도로 보길도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습니다.

내가 고산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 염소와 오리, 닭들을 막 지각하고 구별해내던 그 무렵부터였을 겁니다. 지관이었던 할아버지가 늘 윤고산, 윤고산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저는 윤고산을 이웃마을 사는 할아버지의 친구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묘 자리를 잡고 집터를 찾는 할아버지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으며, 보길도 주민들 가운데 살아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400년이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보길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한 뒤 내 의식 속에서 고산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 고향에 남은 친구들, 마을 어른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학교 교과서에선가 고산을 조우하고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그것은 고산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지은 유명한 시인이었다 해서가 아닙니다. 고산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니! 그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의식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는 국어 교사들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이라니! 그런데도 그렇게 산 사람들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니! 그 의문만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보옥리 해변에서 만난 아기염소 Ⓒ섬학교

세연정이며 세연지, 회수담 등 고산이 축조했던 구조물과 연못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에야 새롭게 알게 된 지식입니다. 동천석실이며 낙서재, 곡수당, 낭음계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피라미 낚시를 하던 낚시터가 세연지였으며 미술 시간에 진흙을 퍼다 공작을 하던 놀이터가 세연정 자리였고 민방위 훈련시간에 대피했던 방공호가 봉화대 터였습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만난 고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그는 더 이상 낭만적인 시인이 아니라 섬 주민들 위에 군림한 섬의 지배자였던 것이지요.

광해군 시절, 30세 백면서생의 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이첨 등 권신들의 부패와 전횡을 탄핵하다 귀양살이를 떠난 실천적 지식인 고산. 쉰한 살의 나이에 13세 소녀였던 설씨녀를 만나 평생을 사랑한 열정적인 로맨티스트 고산.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설계한 건물을 세우고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꾸민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임진, 병자 양대 전쟁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자기 왕국을 꾸미는데 허비해버린 이기적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속을 초탈했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칠십이 넘어서까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앙 정계의 권력 투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다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지극히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고산이 보길도로 들어간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적 전쟁이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종결된 직후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은 가노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서해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향합니다. 하지만 배가 강화도에 당도하기도 전에 강화도는 청나라에 함락되고, 고산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남하하게 됩니다. 배가 해남 인근을 지나갈 무렵 고산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당시 고산의 나이 51세. 고산은 제주도에 은둔하기 위해 바로 뱃길을 떠납니다. 항해 도중 바람 길이 바뀌자 보길도 대풍(待風)기미에 배를 정박하고 범선을 날라줄 바람을 기다리다 문득 보길도의 산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바로 그 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고산은 보길도에 별서(별장)를 짓고 해남과 한양, 유배지였던 함경도 삼수, 경상도 영덕 등을 들락거리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합니다.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해 들어가며 꿈에 그리던 낙원[仙界]을 발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고산은 낙원을 얻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고산에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보길도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버릴 수 없었고, 어쩌면 낙원일 수도 있었던 땅을 도피와 쾌락의 은둔 공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실상 그의 낙원은 왕이 기거하는 한양의 왕궁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집인 낙서재를 북향하여 왕이 있는 한양 쪽으로 세웠고, 세연지 연못가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과는 달리 끝내 부름을 받지 못했고, 부름을 받을 만하면 정치적 반대파들의 방해로 좌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요. 그가 꿈꾸던 왕궁이라는 낙원으로의 출사가 좌절되었을 때 그는 전혀 새로운 낙원을 꿈꿀 수는 없었을까요.

만약 고산이 출사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사를 염원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했을 때 한양이 아니라 저 본토로부터 버림받은 땅, 보길도, 소안도, 노화도, 당사도, 넙도, 흑일도, 백일도 등의 섬들, 그 섬 안의 민중들을 부축하여 함께 낙원을 세울 수는 없었을까요.

▲안개에 휩쌓인 보옥리 뾰족산 Ⓒ섬학교

임진, 병자 양대 전쟁이 끝나고,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비단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권력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이 땅의 민중들은 기아와 역병으로 또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까. 하지만 고산은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민중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만의 '낙원'을 만드는데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보길도의 세연정이고 낙서재이며 동천석실입니다. 그것이 또한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 별서들입니다. 그것을 시대의 한계만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은 그보다 앞서거나 동시대에 부패한 세상을 뒤엎으려던 선비들, 정여립, 허균 같은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신음소리 그치지 않을 때 고산의 정원, 세연정에서는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어부사시사> 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어부사시사>에는 어부의 현실이 없고 어부의 풍경만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고산을 배반한 것은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왕들이나 정적들이 아니었습니다. 고산을 배반한 것은 무엇보다 고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산은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이라는 '낙원'을 세웠으나, 결코 낙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지금은 노화도란 섬과 보길도가 다리로 연결되어 여객선은 노화도의 동천항이나 산양항으로 입항합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길도의 관문은 보길도 청별항이었습니다. 고산이 사람들을 배웅하며 작별을 했다는 데서 유래된 청별(淸別). 청별항에서 세연정 방향으로 5백 미터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호수처럼 아늑한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이 황원포입니다. 윤위가 <보길도지>에서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고 기록했던 그 황원포입니다.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논이 생기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만조 때면 비할 데가 없이 그윽합니다.

다시 500여 미터를 가면 세연정 정원입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누정 공간, 말하자면 위락시설인 셈입니다. 고산 스스로 놀거나 친구들, 조정의 관리들이 왔을 때 접대하던 장소가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펼쳐진 세연지, 회수담, 연희무대였던 동대와 서대, 산중턱의 옥소대 등입니다. 고산 당시에는 3천여 평의 공간이 세연정 정원이었다는데 지금은 일부인 1천여 평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바로 옆 건물은 보길초등학교입니다.

세연정과 옥소대를 둘러본 뒤, 큰 도로를 따라 부용리 마을로 향합니다. 정면에 보이는 큰 봉우리가 해발 425m인 보길도의 주봉 적자산입니다. 적자산 앞의 조그맣고 둥근 봉우리는 미산이지요. 산들에 둘러쌓인 마을의 생김이 그대로 연꽃 봉우리 모양입니다. 어째서 고산이 그 마을을 부용(芙蓉)동이라 이름 지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이, 숙제의 수양산에서 따온 미산(薇山)이라는 이름은 무언가 어색하기만 합니다. 고산은 백이, 숙제처럼 고사리나 뜯으며 산중에 은거하겠다고 '고사리산'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보길도에서 고산의 삶은 기실 고사리 뜯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부용리에 들어서면 그대로 산중입니다. 더 이상 바다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 갯냄새 나지 않는 첩첩산중. 부용리 마을회관 앞에서 이정표는 낙서재와 동천석실 양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마을회관부터 부용리 마을 전체가 동백나무 숲속에 들어 있습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면 벌치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트럭 가득 벌통을 싣고 와 꿀을 따가곤 합니다.

낙서재 쪽으로 들어섭니다. 근래에 복원이 된 낙서재 권역은 고산의 주거공간이었습니다. 3천여 평의 공간에 낙서재, 곡수당, 곡수대, 동와, 서와 등의 건물과 연못 등이 있었는데 고산은 이곳에 기거하며 보길도에서 얻은 자식들과 제자들을 길러냈다 합니다. 고산이 낙서재에 기거하며 지은 시 한 편입니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세상의 무슨 일이 내 마음에 이르리요
가슴 가득한 호연지기를 아는 이 없으니
한 곡의 미친 노래를 홀로 읊어 보노라

(고산 윤선도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 전문)

▲낙서재에서 바라본 부용리 마을 풍경 Ⓒ섬학교

낙서재 등의 건물은 고산 사후 자식들이 기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낙서재에서 내려와 동천석실로 향합니다. 석실에 이르려면 계곡을 건너야 합니다. 계곡의 물이 말라 있습니다. 한때 빼어났던 이 계곡은 우기 한 철만을 제외하고 늘 바짝 말라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다 저 위의 상수원댐 때문입니다. 고산이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은 물소리가 난다하여 낭음계라 이름한 계곡. 그 빼어난 계곡미는 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일입니다. 당시 부용리 마을 주민들은 크게 반대했습니다. 댐을 건설하지 않아도 사철 계곡에 넘치는 물로 식수나 농업용수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 섬 노화도 상업지구에 상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군사정권은 부용리 주민들의 항의 시위를 무장경찰을 들여보내 진압하고 댐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돌다리를 건너 개울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됩니다. 고요한 동백나무 터널 아래 한적한 오솔길이 20여 분간 지속됩니다. 고산은 51세 때 13세였던 설씨녀를 만나 셋째 부인으로 삼고 보길도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현재 보길도의 윤씨들은 그 후손들입니다. 고산은 설씨녀와 둘이서 이 길을 자주 올랐다 합니다. 팔순이 된 고산도 보름날 밤이면 달구경을 위해 올랐던 가벼운 길이지만 자동차 문화에 오염된 현대인들은 이 잠깐의 거리도 견디지 못해 투덜거리기 일쑤입니다.

동천석실은 산중턱에 있는 천연의 바위들을 이용해 만든 바위 정원입니다. 위태로운 절벽 위에 단칸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팠습니다. 우기에는 연못자리에 아직도 연꽃이 핍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선계 공간이지요. 석실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적자산 줄기의 능선이 비단결처럼 부드럽습니다. 이곳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천석실이 가진 조경의 뛰어남은 절벽의 정자도, 바위 위의 연못도 아닙니다. 적자산이 품어안은 부용리 마을의 안온함으로 인해 이곳은 비로소 명승이 됩니다. 석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에 취해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일어설 생각이 없습니다. 보길도 여행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도 좋지만 섬에 온 사람들은 바다가 그리워 해변으로 갑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보길도의 해변은 단연 예송리 해수욕장입니다. 하지만 보길도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여러 곳 있습니다. 특히 중리와 통리, 두 백사장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깊지 않아 물놀이하기 아주 좋습니다. 특히 중리 해수욕장은 수백 미터를 바다로 나가도 어른 가슴까지밖에 차지 않는 천혜의 물놀이터입니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그 청환석의 해변으로 인해 명성이 자자하지만 실제 해수욕을 하기는 적당치가 않습니다. 수심이 깊고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놀기에 좋은 곳이지요.

▲정자리 솔섬 앞바다의 일몰 Ⓒ섬학교

장쾌한 바다를 보려면 선창리와 보옥리 마을로 가야 합니다. 특히 보옥리 공룡알해변과 동백숲은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뾰족산 아래 공룡알같이 둥근 돌들이 펼쳐진 해변, 썰물 때의 보옥리 해변은 그 크고 둥근 돌들이 살아 움직이며 들끓습니다. 일몰을 보기 좋은 곳은 겨울철엔 선창리 망끝전망대, 여름철엔 정동리 솔섬이 으뜸입니다. 이제 선창리 망끝전망대에 앉아 진도 쪽으로 지는 해를 보면 영원처럼 길었던 보길도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청산도]

고등어로 퇴비를 만들고 홍등가로 술렁이던 청산도 파시

청산면 소재지인 도청리 물량장에는 어민들 몇이 다시마 양식 준비에 한창입니다. 슬로길의 시작은 도청리 선창가입니다. 이를 미항길이라 이름합니다. 어민들은 미역 양식을 했던 밧줄을 건져내 손질한 뒤 거기에 다시 다시마 종묘를 붙입니다. 양식되는 청산도의 미역과 다시마는 대부분 전복의 밥으로 쓰입니다. 자연산에 목마른 도시인들은 전복 또한 자연산이 최고인 줄 알고 양식보다 몇 배의 높은 가격에 자연산 전복을 사먹습니다.

▲청산도 바닷길. 한없이 멀리 떠나고 싶은 생의 향수를 자극한다. ⓒ섬학교

하지만 알고 보면 양식전복도 자연산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공 사료가 아니라 미역, 다시마 등의 해초만 먹고 바다에서 크기 때문이지요. 먹이가 같고 같은 바다에서 자라는데 자연산과 양식이 크게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실상 패류는 자연산이냐 양식이냐가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얼마나 깨끗한 물에서 자랐는지가 관건입니다. 오염된 물에서 자랐다면 자연산이라 해서 좋을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입니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습니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영광 '파시평(波市坪)'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성어기가 되면 고기잡이배들이 조업하는 어장에 상선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선들은 생선을 팔고 상선들은 식량이나 땔감 따위를 팔았습니다.

어선과 상선들이 뒤엉켜 서로 사고파는 해상시장이 파시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고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차츰 어장 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갔습니다. 파시는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각종 기관 등까지 갖추어진 임시 촌락으로 발전했고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겸했습니다. 파시는 조기, 민어, 고등어, 삼치 등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회유(回游)성 어류들로 인해 번성했습니다. 어선들은 산란장과 먹이를 찾아 회유하는 어군(漁群)을 쫓아다녔고 상인들은 어선들을 쫓아가며 장사를 했습니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습니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 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텅빈 해수욕장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세를 주고 점포를 빌렸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집이었지요.

술을 파는 색시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합니다. 고등어 선단은 한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습니다. 운반선으로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면 일부는 바다에 버렸습니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 소금 간을 해서 간독에 저렸습니다. 그래도 남는 고등어들은 어비(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처럼 생선이 귀한 시절에 고등어 퇴비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요.

▲범바위에 서면 소안도와 보길도 등 다도해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섬학교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다시 맥을 이었습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습니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습니다.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청산도를 기점으로 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 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더 큰 섬인 완도 사람들도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채 3천 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만3천5백 명이나 됐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남획으로 삼치 또한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중반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습니다. 물고기떼가 사라지자 어선도, 사람도 함께 떠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청산도는 한적한 섬이 됐습니다. 청산도 근해에서는 더 이상 물고기들이 잡히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큰 배들이 제주도 부근 바다에서 싹쓸이해버리니 살아남아 청산도까지 올라오는 물고기도 드뭅니다. 잡는 어업은 초어단지를 이용한 문어잡이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지요.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갑니다.

'청산도의 신전' 당리 당집

겨울에는 슬로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그네는 내내 혼자 청산도 길을 걷습니다. 꽃피는 시절 청산도 길을 걷는 것도 좋겠지만 진정 고요하게 걷기에는 인적 드문 이 겨울보다 나은 때가 없습니다. 걷다보면 몸의 열기로 추위쯤이야 금방 물러갑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걷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청산도는 온전히 나만의 섬이 됩니다. 나는 오직 내면의 나와 동행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비로소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유야말로 걷기가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요. 들판에는 겨울의 한복판을 뚫고 돋아난 청보리가 푸르러 갑니다.

언덕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속의 그 구불구불한 길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시멘트로 포장돼 버린 서편제길이 아닙니다. 보리밭 가운데 서 있는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지요. 그것은 바로 당리 당집입니다.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 당리마을의 당집입니다. 하지만 <서편제> 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은 대문짝만하게 서 있는데 당집에 대한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신앙의 성소였고 섬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 신전이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만큼도 대접을 못 받고 있습니다.

▲영화 <서편제>의 무대가 됐던 서편제길 ⓒ섬학교

저 당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지나는 사람들 또한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저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입니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습니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습니다.

청산면사무소 최민교 계장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합니다.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당집에는 한 장군 신뿐만 아니라 부인 신까지 영정을 그려 함께 모셨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영정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봄 농사를 위해 논을 태우던 당리마을 할머니로부터 그 사연을 듣습니다.

"한압씨 함마이가 있었는디 어떤 놈이 불 처질러 부렀소. 아주 기분 나뻐서 죽을 뻔했어요. 교회 다닌 놈이 그랬소."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습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습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냅니다.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았었지만 지금은 이장님이 제주를 겸합니다. 제관은 제주인 이장님 포함 5명 정도가 맡는다 합니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는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일체 삼가야 합니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합니다. 많은 섬들을 다녔지만 청산도 당리 당처럼 아직껏 당제가 지내지는 곳은 희귀합니다. 참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닌가요.

▲천년 동안 이어져온 신전, 당리 당집. 참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섬학교

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고려말 조선초 공도(空島)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습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입니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습니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습니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청산도, 추자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성종 21년(1490)에도 청산도와 추자도에 왜구가 나타났습니다.
"추자도·청산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왜적이며…."

중종 27년 <실록> 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 추자도뿐만 아니라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합니다. 전란 전부터 서남해 섬들은 이미 왜구들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한철(1744-?)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합니다. <표해록>은 후일 대정 현감을 지내게 되는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청산도는 이웃 섬 신지도진에 부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섬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진진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 한 사람을 거느리고 어제 저녁 이 섬에 들어와 혹은 이정(理正)을 몽둥이로 때려 주식(酒食)을 억지로 달라 하여 먹으며 혹은 남자 광대를 족쳐서 전재(錢財)를 빼앗기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기까지 합니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왕화(王化)를 입은 육지의 땅들도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감시마저 미치지 못하는 섬은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섬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이 삶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통 또한 그러합니다. 섬으로, 산 속으로 숨는다 해서 삶의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

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습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절박한 농사의 유물이 또 있을까요. 구들장 논.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습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랑이 논입니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저 구들장 논입니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쌀값이 라면 값보다 못한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청산도에서 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논은 섬사람들을 먹이고 입힙니다. 청산도 겨울 들녘에는 볏단과 두엄더미들이 움막처럼 쌓였습니다. 두엄, 저 냄새 나는 똥거름을 쌀과 마늘, 유자와 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땅입니다. 오로지 땅만이 똥냄새를 향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지녔습니다. 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소입니다. 육체를 살찌우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생명의 발전소.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입니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들입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습니다. 오래된 전통은 싸구려 근대화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혀버렸습니다. 새마을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갑니다. 고흥 득량만의 섬들에서 나그네는 썩어 허물어져가는 시멘트 담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백 년 세월에도 여전히 견고하기만 합니다. 바람이 거센 섬의 돌담은 육지 내륙과 달리 흙을 넣지 않고 돌만으로 쌓은 강담입니다. 섬이나 해안가 집들은 모두 이런 강담이지요. 이 돌담은 바람을 차단하는 바람의 방어벽이 아닙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분산, 통과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습니다. 허술해 보이는 돌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고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협정의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입니다.

▲바람의 장례...청산도 구장리 앞산의 초분 ⓒ섬학교

초분, 바람의 장례

노인 한 분이 천변의 논가에서 작년 여름 물난리에 무너진 축대를 다시 쌓고 있습니다. 겨울 청산도의 논에는 온통 마늘이 심어져 있습니다. 나그네의 눈에는 다 같은 마늘처럼 보이는데 노인은 논과 밭에 심는 마늘의 종자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청산도의 밭에는 주로 대만산 마늘을 심습니다. 하지만 논에는 대부분 '멍청이 마늘'을 심습니다. 멍청이는 욕이 아닙니다. 스페인산 마늘은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해서 섬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입니다.

오늘, 섬의 땅 절반은 사자(死者)의 영토입니다. 밭에도 산 중턱에도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무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저 묘의 주인 중 누군가는 표류해 온 제주 유생 장한철에게 밥과 술을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요.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습니다.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습니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 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습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습니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습니다.

지붕에는 솔가지가 드문드문 얹혀 있습니다. 솔가지를 꺾어다 올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잘 썩지 않는 솔잎의 기운으로 부정한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까요.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이 선산의 어느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입니다. 솔바람에 솔숲이 일렁입니다. 서로 멀지 않은 완도의 섬들도 초분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지요.

초분을 쓰는 것은 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론 소나 개의 산달에 초상집을 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그네의 고향 섬 보길도에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해에 초상이 나면 초분을 썼습니다. 자녀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놨는데 초상이 나는 경우가 그런 때입니다. 자식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초상이 나도 초분을 썼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합니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치르는 것이지요.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르지요.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합니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초분은 풍장입니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이중 장례 풍습이지요. 하지만 축대를 쌓는 노인이 들려주는 청산도의 풍장은 그것과 조금 다른 듯합니다.

"바람에 말라 수분이 쪽 빠지면 마른 장작 같이 되는디, 그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어라우."

여름철 습기 많은 섬에서 방부 처리도 하지 않은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노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풍화되지 않고 미이라처럼 육신이 마르는, 그런 경우도 더러 있었던 것일까요, 이 섬에서는.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습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태워 매장되기도 합니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 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습니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합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요. 겨울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습니다. 청산도에 다시 어둠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서편제길 언덕에서 바라본 도락리 마을과 바다 풍경 ⓒ섬학교

섬학교 제23강 새해맞이 특강 <보길도와 청산도> 2박3일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3일(금요일)>

06:10 서울 출발 (뱃시각을 대야 하니 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3강 여는 모임
11:10 해남 땅끝마을 도착
12:00 땅끝 출항
12:30 노화도 산양진항 도착
12:50-13:50 점심식사
(노화도 이목리 식당에서 생우럭탕 또는 생장어탕요리)
14:00-16:00 보길도 부용동 원림 걷기(4km)
세연정→(버스 이동)→부용리 입구 다리→동백길→동천석실→부용리 동백숲→낙서재
16:00-17:30 보옥리 공룡알해변과 동백숲 탐방, 망끝전망대 일몰 감상

18: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
(노화도 식당에서 자연산 생선회와 매운탕요리)
20:30 보길도 중리해수욕장 숙소 도착(보길도 솔밭콘도) 및 취침

▲섬학교 제23강 보길도 답사로 ⓒ섬학교

<1월 4일(토요일)>
06:00 기상
07:00-08:00 아침식사
(숙소 식당에서 전복죽)
08:10-10:00숨겨진 비경 도치미끝 걷기
10:00-10:40 송시열 글씐바위 탐방
11:00-11:40 예송리해변 탐방
12:20 노화 동천항 출항
13:00 완도 화흥포항 도착
13:15-14:00 점심식사
(완도읍내 식당에서 생선구이)
14:30 완도항 출항
15:10 청산도 도착
15:20-17:30 청산도 걷기 첫째날
(8km)
도청항→당리 당집→서편제길→화랑포 삼거리→연애바위 입구→모래남길(당리재)→서편제길→도청항
18: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

<1월 5일(일요일)>
06:00 기상
07:00 아침식사
08:00 버스 이동
08:20-11:30 청산도 걷기 둘째날
(7km)
권덕리→말탄바위→범바위→범바위주차장→칼바위전망대→공룡알해변(장기미)→범바위 입구 삼거리→매봉산 등산로 입구→청계리 중촌들샘→다랑치길(다랑이논)→슬로푸드체험관
11:40-12:40 점심식사
(도청항 식당에서 백반)
13:00 청산도 출항
13:50 완도 도착
13:50-14:30 완도어시장 장보기. 제23강 마무리 모임
14:40 서울 향발


▲섬학교 제23강 청산도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 차림(따뜻한 등산복/배낭/등산화), 보온모자,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아이젠, 보온수통,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http://www.yes24.com/24/goods/3261557?scode=032&OzSrank=1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http://www.yes24.com/24/goods/5185914?scode=032&OzSrank=1
<어머니전>
http://www.yes24.com/24/goods/6996168?scode=032&OzSrank=1

새해맞이 특강 <보길도와 청산도>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8회 식사비 및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32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공지-새봄 제주도 특집]

섬학교는 새해 4월 4일(금)부터 6일(일)까지 2박 3일간 제26강으로 [봄특집 : 제주의 17만평 청보리밭 <가파도>와 화산섬 <비양도> 걷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참 남은 제26강 답사를 미리 공지하는 까닭은 항공권 확보 때문입니다. 이번 답사는 각자 항공편(또는 배편)으로 이동해서 제주공항에서 모일 예정입니다. 따라서 항공권을 예매해야 하는데, 답사 즈음에는 항공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가격도 비쌉니다. 미리미리 항공권을 구입해야 합니다. 예매는 빠를수록 편리하고 이점이 많습니다. 섬학교의 <새봄 제주도 특집> 참가자는 먼저 반드시 항공편을 예매하시고 참가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새봄 제주도 특집] 기사 바로보기

[학습자료]

<보길도>

[보길도(甫吉島)]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의 본섬이다. 완도읍에서 남서쪽으로 18.3㎞, 해남군 땅끝에서 12km 떨어져 있고, 완도군 노화도와 소안도, 넙도 등과 지근거리에 있다. 면적 32.99㎢에 인구 4천여 명.

[보길도 지명 유래] <고려사> 제113권, 열전 제26에 최영 장군이 이끄는 전함이 보길도(普吉島)에 도착해 정박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산 윤선도의 입도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보길도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普吉島가 후일 甫吉島로 한자가 바뀐 것으로 사료된다. 보길도의 한자는 유래와 관련해서는 보고래, 배골두, 보고래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인근 섬의 주민들이 보길도를 바구리섬이라고 불렀던 것에 비추어 바구리의 옛말인 보고리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園林)] 주택 속에 인위적인 조경을 한 것이 정원이다. 반면에 동산과 숲, 계곡 등 자연을 그대로 조경으로 삼아 집과 정자 등의 건축물을 배치한 것이 원림이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고산이 보길도 부용리와 부황리 일대의 계곡과 바위, 숲과 동산 등 자연을 조경으로 활용하여 정자와 집들을 배치하고 가꾼 것이다. 크게 3대 공간으로 나뉜다. 낙서재, 곡수당 등의 주거 공간, 동천석실 일대의 선계 공간, 세연정 일대의 위락 공간이 그것이다.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4호로 변경되었다. 지정면적은 480,728㎡.

-세연지(洗然池)
자연 계곡을 판석(板石)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의 돌다리)를 세워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 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

-세연정(洗然亭)
1637년,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단을 조성하여 지은 3칸짜리 정자이다.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현판이 달렸었다. 낙기란, 호광루, 세연정 등.

-낙서재(樂書齋)
거주 공간. 주거하며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도 하던 곳이다. 동천석실과 대각선상에 있다. 무민당(無悶堂) 등 건물 4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집터만 남았었다. 최근에 고증을 통해 복원했다.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와 설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조성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이 있었다.

-동천석실(洞天石室)
동천은 선계를 뜻한다. 산 중턱 절벽 위에 지은 1칸짜리 집. 여기서 독서하며 사색을 즐겼다 한다.

-그밖에 옥소대, 소은병(小隱屛),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고산이 보길도 내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판석보로 흐르는 계곡을 막아 세연지 연못을 조성한 것은 기발하다.

[백도리(白道里)] 속칭으로 부르던 이름은 백두. 우암 송시열이 1689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선백두 글씐바위에 남겨놓은 시에는 백도(白島)로 기록되어 있다. 백도리 주변에 있는 바위들이 흰색으로 되어 있어 하얀 섬같이 보인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백도리에서 맨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을 안백두, 선백두라 한다. 선백두 해안 백도리에서 처음으로 김발을 막았던 곳은 발막금이라 한다.

[중리(中里)] 통리, 여항, 백도, 중리의 4개 마을 중 가장 중심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

[여항리(余項里)] 보길도 지형으로 보아 주머니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해서 목덜미 항(項)자를 붙여서 여항이라 했다. 옛 기록에는 여복항리라 했다. 여항 마을 옆의 작은 무인도는 목섬이다.
[통리(桶里)] 해안선 모양이 물통처럼 생겼고 만조 시에는 통에 물을 가득 담아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덜밑, 북암, 농암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예송리(禮松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때 장흥 마씨(長興 馬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해남 윤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검푸른 갯돌 해변과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常綠樹林)이 있다.

[예송리 애들구미]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거칠게 부딪치는 곳으로, 고기잡이배가 풍랑으로 육지를 눈앞에 두고 파선하여 어부들이 죽으니 애들업다(억울하다) 해서 애들구미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복생도(卜生島)] 예송리 앞의 무인도. 풍란자생지로 유명하다. 오랜 옛날 당사도의 생김이 임금 왕(王)자 모양이라 왕이 날 섬이라 했는데 어느 순간 점 복자를 쓰는 복생도(卜生島)가 생겨나며 당사도는 구슬 옥(玉)자 모양으로 변해버렸고 왕이 나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기섬] 예송리 아기장수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섬. 아기장수 군대의 깃발을 들고 달려오다 아기장수가 죽자 그대로 멈춰 섬이 되어버렸다.

[갈마섬] 아기장수 설화에 나오는 섬. 아기장수를 태우러 오던 천리마가 그대로 멈춰서 섬이 되어버렸다 해서 갈마섬이다.

[예작도(禮作里)] 예송리 앞바다의 작은 섬. 조선 순조(純祖 1801∼1834) 때 김해 김씨가 제일 먼저 입주하고 그후 다른 성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섬에재기 또는 도예재기 등으로 불렀다. 감탕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감탕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3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송리(月松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 임금 때 강릉 유씨(江陵 劉氏)가 처음 입주하였고 이어서 철종대에 김해 김씨와 경주 정씨, 전주 이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월송리를 월숭재이, 월숭정이라 불렀다. 방조제를 막아 만들어진 월송리 앞 들녘을 뻘땅이라 한다.

[청별(淸別)리] 원래 부황리의 일부였으나 면소재지가 되면서 청별리로 분리됐다. 고산이 지은 이름.

[부황리(芙黃里)]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원림 중 유희 공간인 세연정, 세연지 등이 있다. 원래 황원동이었으나 일제시대인 1914년 부용동과 황원동을 같은 행정마을로 만들면서 앞머리 한자씩을 따다 부황리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 혹은 환동이라 부른다.

[부용리(芙蓉里)] 부용동 원림 중 주거 공간인 낙서재, 곡수당 등과 선계 공간인 동천석실이 있는 마을. 마을 전체가 분지형으로 부용화(芙蓉花, 연꽃) 같이 생겼다하여 부용동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부용리를 빈동이라 한다. 고산이 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조산이 있다. 낙서재를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비보(裨補)로 조산(造山)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보옥리(甫玉里)] 1700년대 전주 이씨가 처음 입주하였다. 마을 앞 뾰족산[甫竹山] 해변가에 용이 기거하다가 큰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였다 하여 보옥리라 했다 한다. 선창리와 함께 보길도에서 멸치잡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질 좋은 멸치와 멸치젓을 싼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섬사람들은 뽀리기, 뽀래기라 한다.

[정자리(亭子里)] 인조(仁祖 1623∼1649) 때 김서오가 정쟁을 피해 입주하고 그 후 고씨, 강씨, 심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에 좋은 정자나무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 하여 정자리(亭子里)라 하였다고 한다.

[정자리 우두(牛頭)] 마을의 지형이 소머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숯구목재] 정자리에서 부황리로 넘어가는 옛길. 옛날에 숯을 굽던 곳, 지금도 많은 숯굴터가 남아 있다.

[정동리(亭東里)] 조선시대 현종(顯宗 1660∼1674) 때 창녕 조씨가 해남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그후 임씨, 박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처음에는 정자리(亭子里)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주민수의 증가로 분구되면서 정자리의 동쪽에 있다 하여 정동리(亭東里)라고 하였다.

[등문(登門)] 정동리의 자연부락. 고산 윤선도가 처음 보길도에 왔을 때 올랐던 곳이라 등문(登門)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여객선은 등문 앞바다에서 기항을 했고 종선이라는 작은 나룻배가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솔섬] 정동리 마을 앞 선착장 옆 2천여 평 정도의 무인도. 정동리 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섬 위에는 30여 주의 소나무 고목이 자생한다. 일몰이 일품이다.

[선창리(仙昌里)] 김해 김씨, 초계 최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후 천안 김씨, 안동 권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 제주도를 드나들던 선박들의 선착장이라 해서 선창리(船倉里)라 하다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창리(仙昌里)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전설에는 제주도 한라산 산신이 지리산 산신에게 초청을 받아 가던 중 마을 남쪽 망매산 망월봉에서 달구경하고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니 인민(人民)이 창성할 마을이라 해서 선창리(仙昌里)라 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경치가 좋아 선인들이 놀던 곳이라 하여 선창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청산도>

[청산도] 청산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면의 중심 섬이다. 면적 33.3㎢, 해안선 둘레는 85.6km이며 최고봉은 매봉산(384m)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9km, 뱃길로는 45분 거리다. 주변의 장도(長島)·대모도(大茅島)·소모도(小茅島)·여서도(麗瑞島)가 청산면에 소속된 섬들이다.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전복, 김, 미역 양식 등을 한다. 산과 바다가 유난히 푸르러 청산(靑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한때는 신선이 살고 있는 섬이라고 하여 선산(仙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나 여말선초 남해안에 왜구의 출몰하면서 사람의 거주가 금지됐다. 다시 사람의 거주가 허락된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선조 41년)부터다. 1681년(숙종 7년)에 수군 만호진(水軍 萬戶鎭)이 설치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는 청산도에 당리진(堂里鎭)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대를 관장하기도 했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고 슬로길이라는 걷기 길이 생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섬이 됐다. 막개발과 난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비켜나 있었던 까닭에 옛 모습이 제대로 보존된 보기 드문 섬이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다. 텅 빈 해수욕장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것과 같았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집이었다. 술을 파는 색시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고등어 선단은 한 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다.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맥을 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다.

[미항길] 미항길은 청산면 소재지인 도청리 포구를 따라 가는 길이다. 도청항은 청산도의 관문이다.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다.

[동구정길] 도청항에서부터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까지의 길은 청산도의 상징 같은 길이다.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담장과 함께 4월에는 유채꽃과 청보리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영화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 장면을 촬영한 길로 유명하다.

[사랑길] 당리 화랑포에서 구장리 앞개까지 이르는 길은 해안절벽을 따라 놓인 길로 탁 트인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섬 지역의 장례풍습인 초분(관을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무덤)도 볼 수 있다.

[낭길] 구장리의 갯돌해안(읍리앞 갯돌)은 모래 없이 갯돌로만 이루어진 해변으로 맨발로 걸으면 둥글둥글한 갯돌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절벽을 따라 난 길이라 하여 '낭길'이라 부르는데 뛰어난 해안경관을 자랑한다.

[당리 당집] 서편제길 초입의 당리 당집. 당리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서편제 촬영장]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의 주요 명장면을 촬영한 세트장과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구불구불한 돌담길이 유명하다.

[봄의 왈츠 촬영장] <겨울연가>에 이어지는 KBS 유명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세트장과 계절별 청보리밭, 유채꽃밭, 코스모스길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길이 장관이다.


[화랑포] 화창한 날씨에 바라다 보이는 앞바다의 파도가 마치 꽃처럼 보인다 하여 화랑포라 부르며,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한다.

[범바위길] 권덕리를 지나 보적산 8부 능선을 오르는 길에 범바위가 있으며,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를 했더니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 울음소리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가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여서도와 제주도까지 볼 수 있고 남해의 풍광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용길] 장기미해안은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으로 그 옆으로는 계곡물과 해수가 공존하는 특이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청산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청계리와 원동리는 구들장 논(구들을 깔듯 논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만든 논)이 펼쳐진 곳으로, 어족자원은 풍부했으나 쌀이 귀했던 시절 한 줌 흙마저 아껴 농사를 지어야 했던 섬사람들의 생존방식을 느낄 수 있다.

[돌담길/들국화길] 상서리 돌담은 2006년 등록문화제 제279호로 지정되었으며 운치 있는 돌담은 동촌리까지 이어짐. 동촌리에서 항도로 이어지는 길은 방파재로 연결되어 있으며 갯바위 낚시를 즐기거나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초분] 풍장의 한 방식으로 일종의 풀무덤이며, 섬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통장례풍습이다.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씻골) 땅에 묻으며 청산도 주민들의 장례풍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초분은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이중 장례 풍습이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읍리 고인돌] 문화재자료 제116호.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청산도에는 고인돌 밑에 기둥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인 지석묘가 있으며 총 16기 중 현재는 3기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마비] 문화재자료 제108호.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신앙물로 자연석에 부처를 새겼는데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전한다.

[읍리앞 갯돌] 구장리 인근의 읍리앞개는 동글동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

[구들장 논] 구들을 깔듯 논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만든 구들장 논은 섬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청산도의 전통 농경 형태이다.

[돌담]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된 상서리 돌담길과 원형 그대로의 동촌리 돌담길은 섬생활 문화의 독특함을 살펴볼 수 있으며 옛 시골마을의 정취를 돌담길을 걸으며 한껏 느낄 수 있다. 교장 | 강제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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