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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 듣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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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 듣고는…"

[인터뷰] <물러서지 않는 진심> 펴낸 추미애 의원

<라디오스타> 식으로 묻는다면 이런 거였다. '추미애에게 노무현이란?' 파노라마 같은 두 사람의 정치적 애증을 몇 단어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눈물을 글썽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구(舊) 민주당의 분당 사태, 탄핵, 삼보일배, 낙선…. 얼추 10년이 흐른 과거지사가 아직도 그에겐 옛일이 아니었다. 5년 전, 노 전 대통령이 몸을 던져 황망히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미처 개인적 사과를 하지 못했던 후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응어리가 그렇게 눈가를 적셨을 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증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정한 정치 리더였다. 판사직을 뒤로 하고 서른여덟에 정계에 입문, 강단있는 정치력을 선보인 그에게 사람들은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과는 불화했다. 지난 10년, 야권 분열의 씨앗과도 같았던 대북송금 특검 수용, 열린우리당 창당 앞에 그는 노무현과 다른 길을 택했다. 거대하고 빠르게 전개된 격변의 시기는 그가 견지한 통합의 소신을 거침없이 밟고 지나갔다.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엔 1년여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온갖 번뇌 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며 보낸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18대 총선에 당선돼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9년 말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던 그가 "파국을 막고자" 통과시킨 소위 '추미애 노조법'에 민주당은 징계로, 민주노총과 진보진영은 비판으로 답했다. 그 여파로 이후의 당직, 공직 선거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그의 소신은 또 한 번 정치적 부메랑을 맞았다.

20년 가까이 롤러코스터 같은 정치 경로를 거쳐온 추 의원도 이제 50대 후반. 그가 이제 이런 말을 한다. "정치적 고결함, 정치적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양심,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나." 아울러 "정치적 자아를 돌아보면서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다짐이다. "지금까지는 세력 분열의 한 가운데에서 스스로 트라우마랄까, 위축된 점도 있었는데, 새해에는 좀 더 시원시원하게 목소리를 내야할 것 같다. 야무지게 박근혜 정권에 견제구를 던지면서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굵직한 정치를 하고 싶다"고.

지난 20년의 정치 인생을 돌아본 책 <물러서지 않는 진심>을 내고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그를 만나 '추미애 정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어봤다. <편집자>

▲ 최근 20년 정치인생을 다룬 자서전 <물러서지 않는 진심>(위애드 펴냄)을 펴낸 민주당 추미애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정치적 시련기? '정치적 자아' 단단해졌다"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며 20년 가까운 정치 인생의 주요 사건들과 정치적 고비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러서지 않는 진심'이라는 제목이 그러하듯, 정치적 소신에 대한 자부가 강하게 다가왔다. 20년 가까운 '추미애 정치'의 핵심을 자평한다면?

추미애 : 사람이 성장하면서 청소년기에는 자아 정체성 구축을 위해 애를 쓴다. 그 한 고비를 넘기면 성숙한 어른이 되는데, 정치적 자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떤 시련기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을 통해 정치적 자아가 구축되는 것 같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판사에서 바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판사라는 직업도 '직업인으로서의 판사'는 아니었고, 누군가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법에 기댄 이들을 온전히 보호하는 데 있어 역할을 다했느냐를 따져보면 안타깝고 후회되던 순간도 많았다.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법도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법조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낄 때도 있었다.

정치도 마찬가지였던 같다. 때로 만족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그 과정 모두 '정치적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온 기간이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데, 할퀴고 할퀼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런 느낌으로 정치 인생을 보냈다.

프레시안 : 강한 소신이 불이익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민주당 분당 사태 당시 견지한 원칙이 낙선으로 이어졌고, 노조법 처리로 인한 징계도 대표적이다. 그 시련이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추미애 : 유리컵이 한 번 깨지고 나면 본드로 붙여도 매끈하지 않다. 형체만 맞췄을 뿐이다. 민주당 분당 사태 당시엔 그런 마음이었다. 무엇을 계산한 것도 아니고,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세 아닌 대세'가 형성이 됐다. 강물이 홍수로 불어나 휩쓸고 지나가는데, 내가 이 떠밀려 가는 대세 뒤에 남아 있는 모래톱이 된 느낌이었다. 정치를 시작할 때는 개혁의 호기를 갖고 만났는데, 왜 분열을 하나? 너무 안타깝고 회한이 남아 삼보일배를 하고 나서도 나 홀로 모래톱이 돼 남아 있다는 서럽고 외로운 느낌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 때조차,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같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정치적 자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책을 쓰고 펜을 내려놓고 나니, 그런 생각 자체가 교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그런 회한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정치적 고결함, 정치적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양심,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나. 어떻게 보면 (이번 책이) '정치인 추미애'의 껍질을 깨는 계기가 됐다. 후회나 미련, 집착을 넘어 이제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그 문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합하라' 가르침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

프레시안 : 정치를 하다보면 소신과 대세의 흐름이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 그 소신으로 인해 다수를 포괄하는 정치적 리더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 점에 대해선 아쉬움이 없나?

추미애 :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혼자만 간직하면 그건 말 그대로 책 속의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너로 몰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우리 정치의 한계이기도 하고, 나 혼자 해낼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우리 정치가 타협 없이 극과 극으로 달리고, 상대를 밟아야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프레시안(최형락)
원칙과 세력의 한계선에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물론 내가 불리하다고 대통령님께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상황에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2004년 낙선 뒤 유학가기 전에 찾아뵈었는데, 그 때는 위로를 많이 해주셨다. 제 마음을 안다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오해해도, 남편과 자식들에게 떳떳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내 소신이 올바르다면, 세상도 사람들도 나중엔 오해를 풀 것이란 얘기였다.

1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통령님을 찾았다. 그 1년은, 온갖 번뇌 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며 보낸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다시 찾은 김 전 대통령은 나를 괴롭혔던 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분노에 쌓여 있었다. 햇볕정책이 대북송금 특검으로 훼손당해 측근들이 감옥에 가 있었고, 세력이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분노를 풀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때 김 전 대통령이 정치란 누군가 깃발을 들고 외쳐야 하는 것이라면서, 외국에서 무슨 공부를 계속하느냐면서 빨리 귀국하라고 하셨다.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꾸짖는 것이기도 했다. 와서 빨리 내 정치를 시작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건 분열로 끝난 정치를 다시 분열로 시작하란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속으론 '이제 아무 것도 없는데, 삼보일배 할 때 힘을 좀 실어주시지…'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에 쌓여있는 어르신에게, 차마 나도 힘들다는 하소연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또 1년이 흐른 뒤 귀국해 대통령님을 찾았다. 1년 전의 화는 많이 가라앉으셨지만, 당시 당의 분열 상황에 대해선 대단히 안타까워 하셨다. '나갈 테면 나가봐라'며 잡지 않았던 민주당이나, 그냥 나가버린 세력이나, 모두 분열의 책임과 잘못이 있다고 하셨다.

탄핵에 대해서도 굉장히 질책하셨다. 아울러 내가 탄핵을 안 했으면 다음 대통령 후보에 오르지 않았겠느냐면서 안타깝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팠다. 오해가 많은 것 같았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무리 말렸지만 듣지 않았고, 끝까지 탄핵을 못 막은 것 뿐이고, 저도 회한이 남았다. 그래서 삼보일배를 하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셨다. 또 통합을 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고 하시면서, 대통령께서 나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돼서 너무 안타깝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신 순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나온 일을 번복할 수 있겠나. 민주당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만들었고, 독점 재벌을 타파하는 공정거래 질서를 만들었고, 남북평화의 비전을 만든 그런 당이라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자랑하셨는데, 그 자긍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것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정면돌파를 선언한 상황이었고, 그 사이에 제가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노 대통령이 사과를 하면 탄핵 당론을 철회하겠다고 했는데 대통령께서도 '할 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나오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대통령께서도 아무 말씀 못 하시고 한숨만 쉬셨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세 가지 국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뽑아준 선거구민, 당을 지지해주는 지지세력, 마지막으로 헌법상의 국민이라는 것이다. 그 중 '두 번째 국민을 항상 존중해라', 이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동교동을 나서는데, 분당으로 이미 지지 세력이 둘로 쪼개지지 않았나. 저로서는 돌아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통합하라"는 말씀을 우회적인 가르침으로 남기셨던 것 같다.

삼보일배 통한 '정치적 사죄'

프레시안 : 책 말미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별도의 장을 할애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진한 그리움도 인상적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과 정치 역정에서 얽힌 애증을 해원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치 인생에서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의미였나?

추미애 : 탄핵 당시를 돌아보면, 저는 당시 당을 책임지는 최고위원에 있었지만 끝까지 탄핵을 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마지막엔 당론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개인 의원으로서가 아니라 당 지도부의 입장에서 당론을 정해놓고 혼자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당의 원로 어르신에게 그렇게 설득했지만 결국 듣지 않았고, 마지막엔 저의 예측이 불행하게도 맞아 떨어지게 됐다.

이후 총선이 있었다. 당시 민주당 지지율은 4~7% 수준이었고, 다급해진 당 사무총장이 저에게 공천의 전권을 준다는 합의문을 가져왔다. 선거 전체를 책임지고 맡으라는 것이다. 저로서는 하겠다고 한 적도 없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총대를 메지 말라'고 말렸다. 그런데 당에서 계속 언론에 추미애가 나선다고 흘리고, 당직자들은 당사에서 띠를 두르고 단식 농성까지 벌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당 대표를 대신해 자필로 쓴 합의문엔 세 가지 내용이 있었다. 첫째는 공천에 대한 전권을 준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비례대표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당 대표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가 특이했는데, 탄핵에 대한 사과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서고 싶지 않은 무대였지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탄핵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죄 없는 당직자들, 그리고 당시 내가 인재영입위원장으로서 모셔온 출마자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결국 그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뒷정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표와 사무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관위 후보 등록을 이틀 앞둔 상황이었다. 당 대표를 만났더니 합의문에 당 대표의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먼저 "서로 믿음이 있으면 되지 무슨 도장이 필요하나. 괜찮다"고 하고 나왔다. 당 대표가 지독하게도 탄핵에 대한 사과는 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으니, 결국 공천할 때 탄핵에 대한 '징계성 공천'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탄핵에 앞장섰던 이들은 적어도 공천에서 탈락시켜 나머지 선거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탈락한 후보들이 반발하자, 당 대표는 공천장 수여 당일 대표 직인을 바꿔 공천장 전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렸다. 당 대표 직인을 뺏으려다가 실패하자 아예 새로 도장을 판 것이다. 그 순간, '아…민주당의 운명이 여기까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탄핵하지 말라고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되지 않았고, 개혁하자는 요구도 그렇게 거부됐다. 그래놓고 나중엔 '추미애가 정치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었다.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다보니 오해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생겼다.

이후에 삼보일배를 하면서, 두 번 죽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몸이 힘들어서 죽고, 그렇다고 하다가 그만두면 정치적으로 죽는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말로 하는 사과는 누가 못하나.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삼보일배를 할 당시, 이건 대통령 개인에 대한 사과라기보다는 국민에 대한 사과라는 생각을 했다. 국민에 대한, 지지 세력에 대한 정치인으로서의 사죄였다. 그리고 그 안엔 노무현 대통령도 포함된 것이다. 이보다 더 진한 게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대통령 개인에 대한 사과는 끝내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2008년 광진구에서 다시 당선됐다. 당선되니까 보좌관이 찾아와 "봉하마을로 저랑 함께 가시죠"라고 하더라. 일단 지켜보자고 했다. 나도 한 번은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때를 한 번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양 세력에 아직 앙금이 남아있었고, 또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다가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듣고는…아, 보좌관 말을 들을 걸,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 그렇게 후회로 밀려왔다.

13년 묵은 '뜨거운 감자' 노조법, 파국을 막기 위한 '소신'

프레시안 : 책에 2009년 노조법 처리 과정의 막전막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현실에 발 딛고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으로서의 고민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로부터 3년여가 흘렀는데, 당시의 결정에 후회는 없나?

추미애 :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노조 전임자들을 다 없애버리려는 획책을 했다. 1997년 제정 이후 13년 동안 유예됐던 노조법이란 해묵은 숙제를 떠안게 된 셈인데, 소수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이 유예된 법의 시행을 막을 힘도, 명분도 없는 상태였다. 결국 가장 반(反)노동 성향이 강했던 이명박 정권을 상대로 노동권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파국을 막는 적절한 조정을 이끌어 내는 것이 당시 나의 숙제였다. 13년 만에 시행을 앞둔 노조법을 그대로 둘 경우, 더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노조 전임자 문제는, 전부 폐지될 위기였던 것을 타임오프로 일부 지켜냈다. 근로시간을 면제받아 전임자 수를 정하는 방식으로 제로베이스까지 내려갔던 것을 한국노총이 노정 간의 협상을 통해 받아낸 것이다. 결국 타임오프는 어느 정도 허용할지 범위가 문제가 됐는데, 최저임금심의위원회처럼 외부에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를 신설하는 중재안을 냈다. 심의위에서 타임오프를 어느 정도로 허용할지 정하도록 하고, 3년마다 개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중재안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이 심의위를 만든다고 해도 정부 입맛에 맞는 위원으로 채울 가능성이 높으니, 3년 뒤 시행령을 개정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둔 것이다. 이후 노동권 보호를 강화하려는 정권이 나타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겠냐는 고민이었다. 어차피 법 자체로는 완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복수노조 시행과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는 또 다른 숙제였다. 민주노총은 쪽에선 이제가지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할 만큼 산별노조운동에 노력해 왔다. 그런데 교섭창구 단일화가 이뤄지면, 산별노조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게 민주노총의 주장이었다. 저도 노조의 발전을 위해선 산별운동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산별노조라고 해서 특별히 교섭권을 주는 방법을 찾을 순 없었다. 과반수 노조가 아닌데도 산별노조라고 무조건 교섭권을 주면, 헌법상 평등권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특히 (민주노총이) 막바지에 와서 교섭창구 단일화만 붙들고, 별도의 산별 교섭권 확보없이는 복수노조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저 역시 산별 운동에 공감하지만 스스로도 논리가 서지 않았고, 그 분들에게 물어봐도 딱히 대안이 없었다. 이 혼란을 견디고 나면 산별노조 운동이 저절로 발전하나? 그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사안 자체가 모든 이해 집단의 대승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기 상당히 어려운 쟁점이었다. 말씀하신 '소신'대로 노조법 처리를 했다지만, 정치적으로는 부메랑도 만만치 않았다.

추미애 : 당에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이란 평을 들었고, 끝내 징계도 받았다. 사실 환경노동위원장은 당시 민주당 의원들 모두가 회피하는 자리었다. 상당한 현안이 있었고,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다. 저는 군말 없이 했다. 그런 일들을 회피하지 않는 게 중요한 자세라고 봤다.

혼자 공부도 많이 했고, 노동법에 밝은 전문가들과 토론도 자주 했다. 어느 정도 (중재안의) 가닥은 잡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엇을 해도 정치적 오해는 비켜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이 책임감을 던져버리지 않고, 회피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고생은 심했지만, 한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다 하는 일이었다고 본다.

"민주, '분열의 10년' 업보 아직 못 풀어…安에 '분열주의자' 비판 자격 없어"

프레시안 : 책에서 민주당 10년을 '분열의 집'이라고 표현했고, 최근 북 콘서트에선 "분열의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가선 안 된다"고 했다. 불안정한 현재의 야권 질서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이는데, 형식적으로는 통합을 이뤘지만 여전히 분열의 소지는 있어 보인다. 10년 경험에 반추했을 때 지금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추미애 : 야권이 분열의 10년 업보를 아직 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이혼하면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야권 지지 세력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분열의 트라우마가 분명히 있는데, 어느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야권의 뜨거운 지지자들을 우리가 방관자로 만들어 버렸다. (대선에서) 두 번 패배하다보니, 소외감만 더 커졌다. 그래서 누구라도 수권을 할 힘이 엿보이면 지지해주겠다는 '두고 보자' 심리로 바뀐 것 같다. 그 사이를 안철수 의원이 파고들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민주당이 안철수 의원과 일종의 '경쟁'을 하게 된 건 민주당이 초래한 것 아닌가?

추미애 : 민주당이 잘못한 것이다. 지난 대선의 경우, 48%의 지지가 사실 처음부터 민주당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엔 25% 미만이었다. 그런데 지지자들은 '마지막으로 믿어보자'는 심리가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에 올인을 해주셨다. 지지세력이 올인한 것이지, 민주당이 노력해서 붙잡은 게 아니다. 그 마음들을 온전히 민주당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분열을 극복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무조건 내가 옳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당은 안철수 의원을 향해 분열을 조장한다는 강한 혐의를 갖고 있는 느낌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양측이 '윈-윈'하는 전략적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추미애 : 저는 안철수 의원을 향해 야권을 분열시키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아니다. 그건 안철수 의원뿐만 아니라 다른 누가 나타나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다. 민주당이 계속 이 상태라면, 안철수 의원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나타나서 깃발을 들었을 것이다.

지지자 입장은 그렇다. 민주당이 쇄신하고 잘 하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큰 실망을 주지 않았나. 그런데 안철수 의원이 나타난 것이다. 민주당이 안철수 의원을 향해 '당신이 분열주의자이고 분열을 획책한다'고 말할 자격은 분명 없다. 저도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아까 야권 지지자들의 마음속엔 수권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크다고 말했는데, 호남의 정치적 대안 찾기는 늘 일정하고 꾸준한 편이다. 24%에서 막판에 48%로 두 배로 올려주는 곳이 호남이다. 정치의식과 수준이 대단히 높은 지역이다. 그런 차원에선, 오히려 안철수 의원이 호남보다는 정치적으로 (야권이) 척박한 곳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이 아닐까 싶다. 민주당에게도 그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호남에서 아성을 빼앗기니 연대할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면, 그게 지지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속 좁은 모습이겠나. '내가 더 쇄신해서 국민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왜 땅 따먹기 하느냐'는 발상이 얼마나 민주당답지 않은 모습인가. 역대 이런 민주당이 없었지 않나. 안 의원이 영남에 교두보를 마련해서 치고 올라 올 때, 호남-수도권의 민주당과 영남의 안철수 신당이 결합한다면 국민들이 볼 때에도 야권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나.

프레시안 :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이 장기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고 보나?

추미애 : 아직은 확답을 하기 힘들다. 정치적 자아는 싹 틔움이 필요한데, (안 의원은) 그것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으로 만개할지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 측면에서 우리와 바라는 것이 일치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데, 커가는 모습이 달라진다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어느 한 쪽으로 단언하기 힘들다. 단순히 호남에서 경쟁을 벌인다고 해서 같이 가자고 하긴 어려울 것 같고, 정치적 자아가 한 꺼풀 더 벗겨지면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세력에 대한 기여는 소명…서울시장 출마? 당의 요구 있다면"

프레시안 : 향후 있을 지도부 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추 의원이 두루 유력한 주자로 거론된다. 향후 정치적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

추미애 : 계속 제 정치적 자아를 들여다보면서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세력에 대한 역할 기여가 제게 주어진 소명이다. 그걸 떠나선 정치권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런 기여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역할 기여를 긍정적인 작용을 통해 하려고 하는 준비단계에 있다. 지금까지는 세력 분열의 한 가운데에서 스스로 트라우마랄까, 위축된 점도 있었는데, 새해에는 좀 더 시원시원하게 목소리를 내야할 것 같다. 야무지게 박근혜 정권에 견제구를 던지면서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굵직한 정치를 하고 싶다.

프레시안 :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추미애 : 당장 출마를 준비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정치 환경이 수도권에서 안철수 신당과 민주당이 경쟁 관계일지, 혹은 동지적 관계일지 분명치 않은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역할을 해 민주당의 대안 가능성을 높여야 할 책무는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민주당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정당이 아닌데, 때로 침몰할 때도 있었고 당이 사라질 위기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민주당을 버리거나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 당이 역할을 해달라고 하면 씩씩하게 할 것이고, 당이 그런 역할 말고 다른 역할을 요구한다면 따를 생각이다. 당이 위기인 만큼 왕성하게 활동할 계획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개헌, 통일시대 대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

프레시안 :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며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앞으로도 개헌에 대해서 적극 목소리를 낼 생각인가?

추미애 : 통일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개헌은 필요하다고 본다. '채텀하우스'라고 영국의 국제문제 전략 연구소가 있다. 그곳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통일 전망을 발제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가 이명박 정부 시절 흡수통일을 요란하게 떠들 때였다. 흡수통일은 절대 이뤄지지 않고, 이뤄져서도 안 된다. 북한 스스로가 정치적 선택을 통해 대한민국과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를테면 북한 식 국민투표를 통해 자발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 발제의 요지였다. 만약 억지로 병합이 된다면, 내부 반란이 생길 수밖에 없고 결국엔 통일의 길과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결사체로서의 통일 투표를 해야만 중국이나 다른 외세의 개입을 막는 자주적 통일이 될 수 있다.

개헌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헌법 구조를 적어도 독일의 연방헌법과 유사한 구조로 바꿔야만 가능하다. 현재 우리 인구가 4000만 명 정도이고 북한은 그 절반 수준인데, 이런 2대1 구조로는 북한이 하나의 정치적 지분을 가질 순 있어도, 정치적 우위에 결코 설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으론 북한이 통일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울러 더 분권화되고 다원화돼 타협을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단히 미숙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하다못해 그렇게 억누르던 이명박 정부 때 조차도 정치 지형이 상당히 분권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선 이 모든 걸 획일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타협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정치가 분권화 되어야 한다.

북한도 정치 발전을 위해 그런 쪽으로 갈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이원화된 내각제라고 본다. 한 국가의 상징으로서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는 대통령을 국민이 뽑고, 내치는 다당제 열린 내각으로 하는 실험을 해야만 나중에 통일도 대비할 수 있다.

"절망으로 보낸 1년…野, 원칙 지키되 논점은 타협해야"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임기 첫 해가 지나갔다. 박근혜 정부의 지난 1년, 어떻게 평가하나?

추미애 : 절망 속에서 보낸 한 해였다. 정치홍보란 것이 대단히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국민통합을 하겠다'고 그렇게 선전했는데 결국 안 하지 않았나.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간판에 불과했고, 그 때 내세웠던 통합형 인사들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통합이 일종의 선전 도구였다면 그 수단은 복지다. 어떻게 보면 야권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셈인데, 이제 '내가 언제 그랬어? 이제 경제 살려야지', 이런 식이다. 경제 살리는 것, 누가 반대했나? 다만 복지를 통한 경제 살리기도 있는데, 그런 방식은 아예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국민통합의 주요한 수단인 복지 정책까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어머니 같은 마음은 간 데 없고,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는 뜻으로 17대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편집자)'만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점에 두고 있는 게 '세', 즉 법질서 세우기 같다. 이게 국정의 제1과제가 되어 버렸다. 국민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까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법질서 세우는 것에 자기 도취돼 승전보를 울리는 그런 대통령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칼을 뽑아들고 흔드는 모습의, 굉장히 위험한 위기의 1년이었다.

프레시안 : 야당이 1년 동안 제대로 역할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많다. 민주당이 가야할 길을 조언한다면?

추미애 : 5년 집권을 놓치고 이제 6년째가 지나갔다. 10년의 시간을 국민들에게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한 책임감이 민주당에 있다. 존 F.케네디가 이런 말을 했다.

"분명히 우리의 미래는 타협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칙에 대한 타협이 아니라 논점에 대한 타협일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 입장을 타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원칙도 때로는 타협하고 자기 자신도 실종시켜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직업인'으로서의 정치를 한 결과다. 그러다보니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안이 없는, 믿음이 안 가는 무리가 되어 버렸다. 야당이라기보다는 한 '무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정치적 책임을 다하고 원칙을 지키되, 동시에 유연성을 가진 야당으로 연마해 가야 한다. 그렇게 국민에게 각인되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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