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영화가 소재로 삼은 '부림 사건'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용공 조작' 시비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시기였다. 폭력 혁명, 사회주의 혁명, 체제 전복 등의 혐의는 영화 속 일개 독서 서클 회원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기획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당시의 국가는 통치를 위해 필요에 따라 용공 사건을 조작해내곤 했으니 비판의 초점이 국가 폭력의 잔혹성과 비정상성에 맞춰지는 것 역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1980년대는 동시에 진심으로 폭력 혁명, 사회주의 혁명, 체제 전복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엄존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가령 1980년대 민중문학론과 노동해방문학론을 수놓았던 격정적인 수사들은 1980년대의 '운동권'들이 단지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연약한 피해자에 머물지 않았음을, 나름의 기획과 혁명에 대한 지향을 품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증언한다. 풀기 어려운 숙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1980년대는 영화가 그려내는 것처럼 국가 폭력에 의한 일방적인 희생양들을 양산했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회주의 혁명을 믿었고 실행하려 했던 이들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거나 처리되어야 하는가?
▲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위더스필름 |
그 유명한 '박인수 사건'에서 법원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바 있다. 하지만 '정조'를 '국민'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메시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50년대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속 학생들이 마르크스-레닌-김일성주의를 신봉하고 폭력적 민중 혁명을 고대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영화가 지금처럼 '감동스럽게' 소비될 수 있었을까? 즉 이 영화는 '보호받아야 할 국민'과 '보호받지 말아야 할, 보호받을 수 없는 국민' 사이의 명확한 경계에 입각해 있다. 물론 이 둘의 경계조차 자주 희미해지고 있는 요즘, 이러한 인식을 환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를 역사화 하는 방법이 이렇게 '선량한 국민'과 '가공할 국가 폭력'의 구도에 갇혀버릴 때 발생하는 문제 역시 분명하다. 1980년대가 가진 정치사회적 의미, 즉 사회주의에 입각해 국가를 전복하려 '기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양산했던 시대라는 사실은 편의적으로 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각은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이러한 감각에 익숙해지다 보면 문득 돌출하는 어떤 '실재'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혹스러운 표정 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 영화 속에서 학생들을 다루는 방식 역시 어딘가 불편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12월 27일 부림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한 <한겨레>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이 인터뷰에서 보이듯 1980년대의 학생들은 단지 철없고 나약했던 피해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와 그에 대한 변혁적 전망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 속에서 이러한 지점은 소거되어 나타난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은 그 부대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만적 소거'는 영화 속에서 1980년대적 기획의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실제 노무현을 변화시킨 것은 80년대의 '민중 운동'이었지만 영화 속 송우석을 변화시킨 것은 그의 실존적 고뇌로 처리된다. (영화 속에서 고문 받던 진우가 사상을 대라는 차동원의 질문에 '실존주의'라고 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우석(완쪽)이 국밥집 주인 최순애(가운데)와 함께 부림사건에 연루된 최순애의 아들 진우를 면회하는 장면. ⓒ위더스필름 |
따라서 이 영화가 이른바 '휴먼 드라마'를 표방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980년대의 정치성이 소거된 자리를 채우는 데 (실존주의와 결합한) '휴머니즘'보다 더욱 적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근원적인 '탈정치성'이 드러난다. 실존했던 정치인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영화의 정치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물론 이때의 '휴먼'은 보편적인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온하고 위험한 '비국민'이 배제된 '선량하고 정직하지만 나약하기 그지없는 보통 국민들'만을 일컫는다. 이렇게 보호받아야 하는 '선량한 국민'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의식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보호하는가?
그것은 바로 '법'과 '모성'이다. 일반적으로 법은 아버지의 은유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진우가 아버지가 없는 '호로 자식'으로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진우의 생물학적 아버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아버지의 기호가 부재한 당대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우석은 이 사라진 '아비'를 되찾아 세우는 인물로서 '법-아버지'의 상징을 담당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악당들과 혈전을 벌이는 <테이큰>과 유사해진다.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 '주먹'으로 해결한다면 <변호인>의 송강호는 '법'이라는 아버지의 또 다른 상징으로 해결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터. 이 영화에서 '모성'은 '휴머니즘'을 구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바, 이렇게 자연화 된 모성 앞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일시 정지되고 만다. 하여 영화 속에서는 1980년대의 다양한 정치적 기획과 실천은 사라지고 아버지의 힘(법)과 어머니의 마음(모성)만이 눈물겹게 부유한다. <변호인>이 선사하는 감동은 실은 이 지점에서 발원하며 끝내 그 경계 내에 고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보다 끈질기게 물어야 할 것은 국가와 제도 안에서, 그 국가에 반하고 제도에 반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법'이 보호하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모성'이 차마 당당하게 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들을 위해 '변호'해줄 것인가? 누가 감히 이 시대의 '안티고네'를 자처하고 나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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