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해방일기" 작업을 지난여름 마무리하면서 그 뒤를 이어 하고 싶은 일이 여러 갈래 떠올랐습니다. 두 달 동안 쉬면서 새 작업의 방향을 "냉전 이후"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달 동안 준비해서 이제 집필을 시작합니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된 이 민족이 분단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며 몇 가지 전보다 확실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하나가 분단의 근본적 원인은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내적 원인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분단을 향한 길을 걸은 자들이 조선인 중에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단의 결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자기 사회를 배신하는 반역자는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칼자루를 쥐게 된 원인을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서 "망국의 역사" 작업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임금의 무능과 무책임이나 몇몇 반역자의 죄악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원인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있었습니다. 서세동점은 최소한 왕조 교체 한 차례는 겪지 않을 수 없는 너무나 거센 물결이었고, 때마침 조선을 삼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이웃나라의 야욕이 있었기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의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도 민족국가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충분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냉전의 상황은 이 민족에게 제국주의 시대보다 별로 유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단 건국을 피하고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반도를 이용 대상으로 여기는 외세가 반역자들에게 실어준 힘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다시 40년이 지난 시점에 또 하나의 기회가 왔습니다. 냉전의 주역이던 미국과 소련 정상이 1989년 12월 3일 냉전 종식을 함께 선언한 것입니다. 냉전이 한민족 분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면, 그 종식은 민족 통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이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통일은커녕 평화협정조차 맺지 못한 채로 적대 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25년 전과 달라진 것도 있지만 중국과 대만 사이의 양안관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초라한 상태입니다.
온 세계가 벗어난 냉전에 한반도만 묶여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강요하는 외세가 없는데도 우리 민족이 분단 상태를 좋아해서 매달려 있단 말일까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1980년대까지 냉전의 장벽은 우리가 넘어서기에 너무나 벅찬 장애물로 보였습니다.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그동안 나타나지 못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접어두겠습니다. 그런데 냉전 종식 후 4반세기가 되도록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따져보려 합니다. 냉전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현상이었고 그 종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미국의 패권과 중국의 흥기가 21세기 한반도에 어떤 상황을 형성하고 있는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집권 세력은 민족 문제 해결에 어떤 자세로 임해온 것인지, 힘닿는 대로 따져보려 합니다.
1주일에 두 차례씩 생각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20여 년 전 학교를 떠난 후 언론계 주변에서 활동해 오며 "역사를 시사로 보고 시사를 역사로 읽는" 자세를 추구해 왔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 자세를 특히 철저하게 지켜보려 합니다. 전문가로서 권위 있는 견해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상식적인 이해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니 독자 여러분도 의견을 많이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올림
남북 관계 개선 흐름에 찬물 끼얹은 훈령 조작 사건
1989년 12월 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이 선언을 전후해서 독일이 통일되는 등 동유럽 공산권이 해체되었다. 냉전에 묶여 있던 한반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던 한국 정부의 반응은 많은 국민들에게 뜻밖으로 느껴질 만큼 빠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미 1988년 2월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방 외교' 정책이 제시되었고, 몇 달 후에는 이를 구체화한 '7.7선언'이 나왔다. 몰타 선언 시점까지 한국은 이미 헝가리와 국교를 맺는 등 동구 여러 나라와 관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몰타 선언 이후 한국의 북방 외교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린 데 이어 9월 말 국교가 맺어졌다. 중국과의 관계는 톈안먼 사태로 인해 다소 지체되었으나 1991년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 대표부 개설을 거쳐 1992년 8월 국교 수립에 이르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시작된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고위급도 보통 고위급이 아니라 남북 총리가 2년 후 제8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지속적으로 여는 회담이었으니 웬만한 정상회담보다 더 크고 깊은 접촉이었다. 지금까지 남북 관계의 가장 기본적 원칙을 담은 것으로 인정되는 1991년 12월의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역시 이 회담의 산물이다.
그런데 1992년 12월로 예정되었던 제9차 회담이 취소되고 남북고위급회담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 회담을 통해 발전되어 온 남북 관계도 중단과 퇴행을 겪게 된다. 냉전 때문에 갈라져 있던 민족이 냉전 해소에 따라 화합의 길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길이 막히면서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멍에를 오랫동안 벗어 던지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2년간 8회에 걸쳐 남북한의 총리 이하 수십 명의 대표단이 만나 남북 관계의 새로운 전개 방향을 의논한 고위급회담은 냉전 해소에 따른 세계적 변화에 발맞추는 노력이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편 4권 140-145쪽 "노태우 정권의 정략적 대북 정책"처럼 북방 외교의 정략성을 지적하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거대한 세계적 변화 앞에서 정략성은 부차적 요소일 뿐이었다. 고위급회담은 남북기본합의서라는 획기적 성과를 낳고도 더욱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면서 동력도 충분히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는 남북 관계 변화의 움직임이 1992년 말 갑자기 중단되어 버린 것이 무슨 까닭이었을까? 아직까지도 걸핏하면 남북 관계를 중단과 퇴행으로 몰아가곤 하는 장애 요소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1992년 9월 제8차 고위급회담에 파탄을 몰고 온 '훈령 조작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통일원 차관으로 회담에 참석했던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289-290쪽에서 회담 직후의 조사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발-수신된 모든 전문을 안기부로부터 제출받았다. 일련번호가 표시된 9월 17일자 평양 발신 전문 4건과 서울 발신 전문 3건 등 총 7건의 3급 비밀 전문의 사본이 입수되었다.
제1호 전문은 정원식 총리의 지시로 내가 평양에서 새벽 0시 30분에 발송한 '청훈 전문'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평양에서 발송된 제2호 전문이 있었다. 202(이동복)가 102(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보낸 이 전문의 내용은 놀랍게도 "청훈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전문에는 "전문을 보고 난 후 파기하라"는 조치 사항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제3호 전문이 오전 7시 15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발신되었는데, 문제의 "3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사실 이 전문은 공식 전문이 아니라 102가 202에게 보낸 SVC(서비스)가 표시된 사신(私信)이었다. 그러나 정 총리와 내가 평양에서 본 전문에는 102와 202, 그리고 'SVC'라는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보내온 정식 훈령으로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이날 오후 4시 15분에는 서울에서 수석대표 앞으로 또 하나의 전문(제7호)이 발신되었다. 이 훈령은 이미 정해진 협상 전략대로 "2개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하여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실제로 북측이 동의했던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의 정식 훈령이었지만, 차석대표이자 이 문제에 관한 협상 책임자인 나에게는 물론, 수석대표인 정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고위급회담의 남한 대표단 대변인 이동복은 당시 국무총리 특보란 명함도 갖고 있었지만, 실제 역할은 안기부장 특보였다. 평양에서 회담이 열릴 때 대표단과 서울 사이의 통신을 안기부가 맡고 있었는데, 이동복은 이를 이용해 수석대표 정원식 총리가 보낸 청훈(請訓) 전문을 가로챈 '청훈 차단',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대통령의 훈령처럼 대표단에게 내놓은 '가짜 훈령 조작', 그리고 대통령이 뒤늦게 보낸 훈령을 감춘 '진짜 훈령 묵살'을 저질러 대표단의 임무 수행을 방해했던 것이다.
▲ 1992년 9월 17일,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이동복 남측 대변인(왼쪽)과 안병수 북측 대변인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양측의 합의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드러나지 않은 배후, 처벌받지 않은 이동복
간이 얼마나 큰 사람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단독 범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독 범행을 주장한 이동복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의 범행 성공을 도운 것으로 보이는 이상연 안기부장과 엄삼탁 기조실장의 책임은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안기부장 특보(차관급)와 남북회담 대표로서 이동복의 신분과 역할도 유지되었다. 사건 며칠 후 열린 고위전략회의(총리, 통일부총리, 안기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통일부 차관과 이동복 참석) 상황을 임동원은 같은 책 293쪽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그가 어째서 이토록 무리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도 모두들 알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8.15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사업을 파탄시킨 것이나, 이번에 훈령 조작으로 또다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을 파탄시킨 것에 대해 모두들 '정권 재창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안보 불안과 긴장 조성으로 남북 관계가 파행되는 것이 특정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유리하다'는 일부 안기부 간부들의 구시대적 판단에 따른 조직적 활동의 소산일 터였다.
단순히 노태우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기에는 민족의 운명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큰 중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한 사정에 대해 드러내놓고 논의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정작 당사자인 이동복 특보도 자기 혼자 저지른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아무런 변명이나 자기방어도 하지 않은 채 시종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원식 총리는 결국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는 한마디 말로 회의를 마쳤다.
이 전략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9월 2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의원의 '폭로'로 청훈 조작 사건이 부각된 것이 전략회의의 배경인데, 이 사실을 임동원은 위 책에서 서술하지 않았다. 임동원 자신, 아니면 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관계자 누군가가 이부영 의원 측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원 남북 관계 '폭로성 심문'
22일 통일원 회의실에서 열린 외무통일위원회의 통일원에 대한 국정감사는 남북 대화 통일 정책에 대한 안기부의 관여 문제를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날 이례적으로 이동복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민주당-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안기부 소속으로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고 있는 상황의 부적합성과 대변인의 사퇴 의사 * 고위급회담 과정에서 '월권' 행위 여부 * 북한 핵문제에 대한 발언들의 문제점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
안기부 쪽에 대한 공세의 포문은 이동복 대변인을 증인으로 신청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공식적으로는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 '국무총리 특별보좌관'으로 돼 있는 이 대변인이 실제로는 '안기부장 제1특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열렸다. 청문회를 방불하게 하는 1문1답 식의 진행 방식으로 들어간 이 의원은 "안기부장 특보가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으면 조직 간의 마찰을 빚을 수 있으므로 당연히 대변인의 소속은 통일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궁했다. 특히 이 의원은 "지난 9월 제8차 고위급회담 당시 정부 쪽에서는 북에 가 있는 대표단에게 이인모 씨 송환과 관련해 기존의 동진호 선원 송환 요구를 빼도 좋다는 훈령을 보냈는데, 이 대변인이 이 훈령을 무시하고 원래 입장을 고수해 이 부분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
민주당-국민당 의원들은 이부영 의원이 처음부터 강성으로 나오자 좀 더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나섰다.
정대철 의원(민주)은 "이 대변인의 신분이 노출됐으므로 남북 대화에 비효율적이고, 북에서 오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결론적으로 고위급회담 대변인을 계속하려면 안기부 쪽 직책을 사퇴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변인을 사퇴하라"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이어 발언권을 얻은 조순환 의원(국민)은 "오늘 이 대변인이 안기부장 특보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 솔직히 놀랐다"고 털어놓은 뒤 "이런 권위주의 시대의 소산은 용납될 수 없다"며 안기부 쪽 직책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는 이어 북한 핵의 생산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 대변인은 사퇴 공세가 거듭되자 "나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 직분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해서 대표단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대변인으로 일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겸직 신분이 지장 있다는 견해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 (<한겨레신문> 1992년 9월 23일)
배후 관계도 밝혀지지 않았고 형사처벌은커녕 인사 조치조차 따르지 않았지만 이 정도 기본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임동원은 공직에서 물러나도 좋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몇 달 후 통일부 차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나중에(1995년 2월) 그가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취임할 때 김대중 이사장이 환영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런 유능한 분을 사무총장으로 영입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제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소위 '훈령 조작사건'이 생겼을 때 이를 계속 추궁한 불굴의 용기와 정의감입니다. 차라리 재야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기는 쉬워도 공직 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참된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같은 책 318-319쪽)
199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이동복이 그토록 '소신껏'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권력 이동이 순탄하지 못했던 사정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이 강경 노선을 향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설명이다. 그러나 퇴임까지 다섯 달이나 남은 현직 대통령을 그렇게까지 물 먹이는 짓이 선거를 석 달 앞둔 후보의 영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을까? 이 사건에 작용한 다른 요인은 없었을지, 다음 회에서 짚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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