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지난해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새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자신의 저서인 <세속의 철학자들>에서 19세기 미국 사회를 '자본가들이 권력을 향해 질주하거나 부를 요란하게 향유해도 그것을 가로막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기업들은 서로 패권을 쥐기 위해 살인과 유괴, 다이너마이트까지 이용한 거친 싸움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는 무자비한 '해적들이 대중을 정중히 다룰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며 기업의 자본 조달 수단이었던 증권 시장에 대해 부자들을 위한 사설 도박장으로 묘사했다. 투자자를 속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중은 한몫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흥분으로 속임수가 판치는 증권 시장을 묵인했다.
두 세기가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의 금융 시장은 어떨까? 하일브로너가 말한 '되돌아보기에 낯 뜨거운 시대'처럼 21세기 대한민국 금융 시장은 두 세기의 시간을 생략해 버린 듯 낯 뜨거움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부실한 저축은행이 대중을 속여 위험한 채권을 예금처럼 판다. 부실기업의 채권을 대중에게 고수익 안전 자산으로 속여 팔아 빚 돌려막기를 한다. 금융 감독 당국은 알고도 묵인하며 저축은행 후순위 채권 피해자 2만여 명, 동양증권 피해자 5만여 명의 가슴 치는 하소연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금융 시스템은 '투자자 책임'이라는 분명한 원칙하에 사기당한 피해자들의 무지를 탓할 뿐 흔들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러나 개인 투자자들에게 적용하는 냉혹한 투자자 책임 원칙은 투자자가 금융 회사일 경우 도덕적 잣대까지 동원되어 투자자를 보호한다. 이와 달리 채무자들이 빚을 못 갚으면 여지없이 '도덕적 해이'에 빠진 인간으로 손가락질 당한다.
따지고 보면 저축은행과 동양그룹에 투자를 한 행위와 금융 회사가 개인에게 돈을 빌려준 행위는 같은 의미의 투자 행위이다. 즉 은행이나 카드사가 개인에게 돈을 빌려준 것도 투자이다. 이 둘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금융 회사가 투자 상품을 작정하고 속여 팔 경우 개인 투자자들은 속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반면, 금융 회사들은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 환경에 있어 개인들은 취약한 정보를 토대로 하고 금융 회사는 투자 대상인 개인의 재무 정보 상당량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한된 정보 혹은 사기적 판매에 노출되어 있는 개인 투자자 보호에는 냉혹하다. 반대로 전 국민이 개인 정보를 제공해 완벽한 투자 환경을 만들어 준 금융 회사의 투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는다. 오히려 투자 대상이었던 개인 채무자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가혹한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이런 이유로 빚 때문에 일가족이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도 빚 500만 원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 '500만 원 먹튀(먹고 튀었다)'라는 도덕적 굴레까지 씌운다. 동양그룹이 금융 계열사를 이용해 사기 판매를 하고도 법원에 회생 신청을 통해 경영권까지 사실상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관대함은 소액의 채무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베풀어지지 않는다.
저소득층 옥죄는 '약탈적 대출'
박근혜 정부는 대선 기간 중 채무자의 빚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과감한 신용 회복 지원 제도를 약속했다. 국민행복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신용유의자 322만 명의 채무를 과감히 줄여주겠다고 했다. 정권 출범 초기부터 이 기금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논란에 부딪혀 박근혜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용서받을 공약으로 전락했다. 대중은 금융 회사들이 언론에 흘리는 '세금으로 빚 탕감'이라는 왜곡된 논리에 분노했고, 빚을 못 갚는 채무 불이행자들을 돈 떼먹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간주했다.
경제 민주화 약속 중 하나였던 국민행복기금은 채무 부담에 짓눌려 사는 경제적 약자에게도 행복의 기회를 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빚 못 갚는 사람을 향한 '도덕적 해이'라는 한마디면 쉽게 파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대선 기간 큰 공약 중 하나였던 국민행복기금은 '국민불행기금'으로 쉽게 모습을 바꿨다. 10월말까지 신청 접수를 진행한 국민행복기금은 월 소득이 40여만 원인 채무자의 1100여만 원 빚을 대상으로 신용 회복을 진행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즉 국민행복기금은 월 40여만 원 버는 사람이 매월 4만7000원씩 10여 년간 빚의 절반이라도 반드시 갚도록 만들겠다는 채무 독촉 프로그램이 되었다.
선진국은 빚을 갚기 어려운 채무자의 빚을 여러 형태의 신용 회복 프로그램으로 갚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에게 대단히 낯설고 용납하기 어려운 채무자의 새 출발 지원 제도는 사실상 채권자의 책임을 묻기 위해 작동하고 있다. 한마디로 돈 떼이기 쉬우니 신중하게 잘 빌려주라는 신호인 셈이다. 더불어 개인 채무자에게는 새 출발의 기회를 광범위하게 제공함으로써 빚 때문에 자살, 도주 등의 극단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안전망을 제공한다.
물론 채무자는 돈을 쉽게 빌리지 못한다. 투자자인 금융 회사가 신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출의 문턱이 높아진다고 비난하는 것도 약탈적 금융 논리에 갇힌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낯 뜨거운 풍경이다.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선진국은 '약탈적 대출'이라고 한다. 갚을 수 없는 줄 알면서 돈을 빌려주는 것은 다른 식으로 이득을 취하거나 채무자의 가족과 지인에게까지 빚의 굴레를 덧씌우는 약탈이 될 수 있다.
금융은 복지가 아니다. 저소득층에게 애초에 필요했던 것은 저임금의 일자리에 분노하거나 부족한 복지 환경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으로서 저항이었을 것이다. 저소득층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갚게 될 경우 모두 다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이는 대한민국은 시민의 힘으로 경제 민주화를 일구어 나갈 동력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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