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그루터기공동체 대표라는 직함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른 감투들이야 이름만 들어봐도 대략 하는 역할이 얼핏 짐작되지만 공동체 대표라는 자리는 헤아리기 어렵다.
▲ 조원희 씨. ⓒ정기석 |
소농들의 생활공동체, 그루터기 작목반
농민운동가인 조 씨는 농민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작목반을 만들었다. 그래서 작목반원들의 면면은 모두 상주농민회를 이끄는 집행부 간부들이다.
"그루터기 작목반은 회칙이 없어요. 문제가 회칙을 정해놓는다고 풀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회원 각자 생활 속의 실천과 변화가 더 나은 조직, 더 단단한 조직을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하는 셈이죠. 충분한 회의와 토론,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의사를 결정하는 토대이자 시스템이죠."
어찌 보면 느슨하고 허술한 조직이다. 하지만 자유롭고 낭만적인 조직이다. 무엇보다 진보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이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작목반은 귀농인큐베이터 노릇까지 감당하고 있다. 상주로 내려온 귀농인이 상주에 정착할 때까지 밭도 빌려주고 곶감건조장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곶감생산기술과 판매노하우와 채널을 기꺼이 전수하고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루터기에서는 3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젊은 농사꾼 10명이 함께 곶감을 생산해요. 감나무를 직접 키우기도 하지만 지역에서 오래 뿌리를 내린 은퇴농의 감나무를 임차해 대신 농사를 짓기도 해요. 밑거름 시비, 방제 작업, 제초 작업은 물론 수확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하고 있어요. 그만큼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 사람 몸에 좋은 농산물이 생산된다고 믿어요."
가는 날도 조원희 씨는 아침 일찍부터 혼자 감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감 같은 자연은 사람의 때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연에 맞춰야 한다. 감 수확은 보통 10월 20일경에 시작해 20일 안에 끝내야 한다. 때를 놓치면 날씨가 추워져 감이 얼어버리거나, 너무 익어 곶감을 만들 수 없다. 오로지 감에만 정신을 팔아야 하는 시기다.
"온전히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일은 쉽지 않아요. 공동체 구성원 각자, 모두 성격이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함께 농사를 짓는 건, 바로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가치와 효용'을 잘 알기 때문이죠. 물론 다름의 가치도 서로 무시하지 않죠. 그래서 구성원 가운데 절반은 각자 곶감을 생산해서 공급해요. 저마다 상황과 형편에 맞게 자유롭고 유연하게 농사를 짓되 서로 도우며 일하고 살자는 약속과 원칙만 지키면 되는 거죠. 그루터기가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적게 버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소농들의 생산,생활 공동체로 성장하는 게 꿈이고요."
▲ 승곡체험마을. ⓒ정기석 |
실사구시적인 농민운동으로 거듭날 때
조원희 씨는 활동적인 농민운동가다. 건국대를 졸업하고 고향 상주로 귀농, 상주농민회장을 지내는 등 늘 지역농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요즘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심정은 애정 못지않게 안타까움도 적지 않다.
"지금 상주농민회 회원이 400명 정도 될 거예요. 상주시 농민이 상주시 인구 40% 정도인 4만 명쯤 되니까, 농민회 조직률은 고작 1%밖에 되지 않는 거죠. 오늘날 쇠락한 우리 농촌과 농업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적나라한 지표라 할 수 있어요. 원인은 몇 가지로 집약돼죠. 단순명쾌해요. 일단 농촌에 젊은 농부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자연적으로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이 되거나 도시로 이농을 하니까요. 무엇보다 농민운동이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게 큰 문제예요. 8년 동안 한 푼도 오르고 있지 않은 쌀 목표가격, 농민의 생존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초국적자본들이 밀실에서 강행하는 FTA, TTP 등이 그 방증이죠. 아무리 농민들이 서울역으로,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여의도 국회로 몰려가 '아스팔트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정부나 정치권은 대꾸도 하지 않죠. 오직 농민의 존재감은 선거철에나 잠깐 명멸하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어요. 농민들은 힘이 없어요. 농민들 안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죠. 정부의 보조금에 길들여진 '다방농민'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고요. 부정할 수 없어요. 이렇게 농민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고착된 건 비단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죠."
▲ 사과수확체험. ⓒ정기석 |
"지금 지역현장에서는 정치투쟁 일변도로 몰아가는 듯한 농민회 중앙 지도부의 투쟁전략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아요. 다종다양한 각 지역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예요. 심지어 농민의 대변자가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만 대변한다는 불만까지 제기되고 있어요. 가령 올해 농민회에서 집중하고 있는 쌀 목표가격, 쌀 관세화 유예 등은 쌀 농사를 주로 짓는 농민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사안이겠죠. 하지만 나머지 작목을 주로 하는 많은 농민들에게는 한중FTA, 농촌복지, 마을공동체개발 등이 오히려 더 절실한 사안일 수 있어요. 지도부가 불편부당한 균형감각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기 쉽죠. 농민운동의 패러다임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농사꾼 조 씨는 '농사는 하늘과 동업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농사를 지어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하늘'이 좌지우지 하더라는 값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농약, 비료, 농기계 등 기술과 자재로 모든 것을 통제해 농사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죠. 돈만 주면 먹을 걸 언제든,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고요. 쌀 자급률 80%대, 식량자급률 23%대로 추락한 지금도 휴대폰, 자동차를 팔아서 외국에서 식량을 사오면 된다는 교과서적 비교우위론자들이 득세하는 게 우리 정부 농정공무원의 현주소예요. 지금도 60%의 식량을 초국적 곡물메이저들한테 수입해 들여온다고 하죠. 그들은 냉혹한 장사꾼들이예요. 식량주권을 잃은 나라는 국가의 주권도 상실한다는 세계사적 경고를 어서 깨달아야 해요."
▲ 승곡리 마을자산 '풍양조씨 종택 양진당' ⓒ정기석 |
농업은 생명산업이다. 농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다. 농업은 국가 주권이다. 더 늦기 전에 밥과 똥이 순환하고, 농민과 소비자가 순환하고, 도시와 농촌이 순환하고, 자연과 사람이 순환하는, 하늘과 동업하는 '지역순환경제'의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더 이름답고 행복해진다. 마을정책가 조원희 씨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앙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