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5ㆍ최종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5ㆍ최종회>

회상을 마치며

***회상을 마치며**

비가 온다.
끝낼 때는 비가 조금 오는 것도 좋다.
조금은 구슬픈 쪽이 더 좋다.
더욱이 실패한 인생을 회상함에랴!

모로 누운 돌부처! 아무리 해도 돌이 황금 될 리 없고 누워도 모로 누운 놈이 벌떡 일어나 곧추설 까닭은 없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내리는 빗속으로 집에 돌아간다는 것.

집에 돌아간다는 것.
흰 그늘에로 돌아가는 길.
성공이 아니라도 집에는 돌아갈 수 있음을 알겠다. 텅 빈 집이지만 집은 집이다. 오늘 저녁은 빗속을 걸어 어느 식당에라도 가서 고기를 좀 먹어야겠다. 헛헛하다. 긴 긴 회상이 끝났기 때문일까?
분명 실패한 인생이지만 두 가지만은 명백히 밝혀졌다. 하나는 객관적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희망의 정체이다.

최근에 내가 누군가로부터 귀담아 들은 용어인 '요기-싸르'가 바로 젊을 때부터 내가 내 삶에 요구해온 그 객관적 사실이고, 바로 그 명상과 변혁이라는 음양법의 밑바탕에서 무엇인가 내 힘에 의한 것은 아닌, 그야말로 한낱 망상적인 희망에 불과할지도 모를 어떤 초월적인 빛이 배어나길 기다리는 것, 그것이 나의 나머지 삶이라는 것, 즉 내 여생의 정체다.

'흰 그늘' 말이다. 그것은 논리 같지만 논리는 아니다. 논리로 이해하는 한, 쉽게 변증법적인 합명제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희망, 그러나 현실적인 치유에 대한 희망이다.
회상을 마치며 내 앞에 5, 6년 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또 있음을 분명히 깨닫는다. 나의 나머지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빈 마음자리 아니면 안 되는 일. 가능할까? 노력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어딘가 흙집 귀퉁이 낮은 벽 밑에 엎드려 작은 글, 못난 그림으로 죽음을 기다릴 것이다.

나는 사람이 죽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소멸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선허(仙墟)에 깃들이는 일은. 그러하매 그것까지 소망할 염치는 없다. 문제는 앞으로 5, 6년 동안 일만을 위해서 조건 없이 이루어야 할 빈 마음자리다. 가능할까? 노력할 것이다.

비가 온다.
끝낼 때는 조금은 구슬픈 쪽이 더 좋다.
이 삶을 다시 회상하는 일은 아예 없을 테니까.

4335년2002년
양력 8월 7일
일산에서 모심.

***다시 회상을 마치며**

양력이긴 하나 계미년을 시작하는 정월 초하루에 이백 자 원고지 백 장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작심대로 난초 대신 달마가 아닌 매화를 치기 시작했다.
난초는 잘 알려진 대로 극도로 섬세하고 변덕스러울 정도로 귀티가 있어 쉽게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책기운〔書卷氣〕이나 글자향기〔文字香〕, 선비로서의 높은 교양과 수련에 의해 다져진 깊은 인품을 요구한다. 멀리는 지난 20여 년, 가깝게는 재작년 봄부터 그야말로 파천황(破天荒)의 무진장한 파지를 내면서 이리저리 갖은 실험과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결국은 동양 삼국의 고금을 다 통틀어 완당의 〈불이선란(不二禪蘭)〉 단 한 작품으로 끝이 나는 지극한 예술의 경지〔至藝之境〕가 난초였던 것이다.

고전의 세계에 깊이 파묻히거나 금석(金石)을 통해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에까지 달통하지 않으면 가까이 가기도 힘든 영역이 바로 난이라는 걸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건방진 소리로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20여 년의 사란(寫蘭)에서 얻은 결론이란 게 겨우 다음과 같은 한 가닥 오기뿐이다.
소남(所南)과 판교(板橋)와 노곤봉(盧坤峯)은 모두 너무 사실적이라 권태롭고, 석파(石坡)는 그 세심법(細心法)이 교활할 정도여서 지겨운 데가 없지 않고, 운미(芸楣)는 청초하긴 하지만 아예 풍류가 없다. 남는 것은 겨우 명나라 때의 중 백정(白丁)의 산란 몇 폭과 완당의 단 한 점 〈불이선란〉뿐이다.

왜 그러한가?
두 가지다. 난은 애당초 '바람의 항구'랄까, '변화의 역려(逆旅)'랄까, 곧 장자의 용어로 하면 '이시(移是)의 집'이어서 바람과 난을 동시에 잡지 못하면 백전백패다. 속도와 위상 사이의 불확정성 원리와도 같다.

난은 분명 형사(形似) 또는 실사(實寫)가 아니지만 끊임없이 변하면서도〔瓢然氣〕 변함없는 뼈기운〔骨氣〕을 함께 못 갖추면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니 사실은 실사가 아닌 것도 아닌 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컨대 꼭 닮은 것의 실사(semblance)가 아니라 숨은 본체, 즉 탁월한 의미의 '리얼리티'가 잡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운〔氣〕인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림에 떨어지면 망한다. '그리지 말고 쳐야 한다.'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석도(石濤)의 주장처럼 '한 획〔一劃〕'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한 획을 유지하려면 불(佛), 즉 선(禪)적인 텅 빈 마음과 선(仙)적인 피나는 몸, 즉 기의 수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당이 스스로 불도 선도 아니라고 한 것은 사실은 불이요, 선으로서의 유(儒), 즉 참선비라는 소리다. 흉내로 될 일이 아니다.

작년 연말 그믐밤에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었다.

"너는 선비냐?"

대답은 즉각 나왔다.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이번엔 대답이 천천히 나왔다.

"예술가다."

"난초를 잠시 멈춰라."

"그러면 달마를 할까?"

또 질문이 이어졌다.

"너는 중이냐?"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시인이다."

"예언자로구나."

"……"

"달마도 하지 마라."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먹장난은 나의 유일한 낙이요, 노후의 저승 가는 길닦기이고, 또 그 말이 허용된다면 하나의 먹참선이다. 절대로 안 할 수는 없다."

이번엔 천천히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러면 새해부터 매화를 해봐라. 그것도 한매(寒梅)를!
꽃이 많지 않고 등걸이 기괴하고 고색창연한 매화, 한참 추울 때 처음 피기 시작하는 몇 개 달린 얼음꽃 같은 백매(白梅) 말이다."

"화형(花兄) 말인가?"

"그래, 빙기(氷机)다. 너는 매화로 수련하는 게 좋다. 매화는 사실 목숨이고 예언이고 고독이다. 바로 그게 선(仙)이다."

매화를 집중하는 체험이 없이는 달마의 기초랄 수 있는 옛스러움(古)과 기괴함(奇怪)에 못간다. 그러나 달마는 항상 곁에 놓아라. 목숨없이 몸 없는 것과 같다.
"…"

이렇게 해서 계미년 초하루부터 매화를 치기 시작했다.
이 말을 왜 하는가?
지난 8월에 회고록을 탈고하며 붙인 '회상을 마치며'에서 내 생애를 실패작이라고 실토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너무 처량하고 곡조 슬프게 그 점을 강변한 것이 좀 지나쳐서다.

일본에서는 '실패학(失敗學)'이 대유행이다. 그들은 심지어 '21세기에는 실패를 잘 활용해야 한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실패학은 내 경우에 어떤 교훈, 어떤 태도 변경, 어떤 마음의 결정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그리 오래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사는 동안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지난 연말과 올 연초만큼 선명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은 따로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밝힌 바 있는 문화운동의 홀로 내 나름의 세 가지 과제를 천착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매화 그림과 함께 매화음(梅花吟) 같은 창연(蒼然)하고 고독한 시를 쓰고 싶다. 우주 너머의 흰 그늘의 길 말이다.

난초와 달마를 안 한다는 게 아니다. 하긴 하는데 매화를 중심에 분명히 세우겠다는 것이고, 천년 묵은 매화 옛 등걸의 그 '괴'와 '기'와 '추'의 '창건기굴(蒼健奇崛)' 위에 '얼음꽃[氷花]'이라고도 부르고 '꽃우두머리〔花魁〕'라고도 부르는 몇 송이 아리따운 꽃예언자를 피워올려 검은 고대와 새하얀 미래를 함께 잡는 신선의 '먹참선', 즉 '선불(仙佛)' 수련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숭고'요 생태변혁의 미학이며, 또한 심오요, 명상의 영성미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입고출신(入古出新)'이니 나의 문예부흥이자 나의 문화혁명일 것이기 때문이며, 마침내는 나의 '흰 그늘'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가 '모로 누운 돌부처'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패한 부처, 벌판에 버려져 잊힌 돌부처라고 해서 그 조성할 때의 깊고 큰 원(願)이 또한 '모심〔侍〕'이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성공이냐 실패냐는 이제 거의 내 심중에도 안중에도 없다. 오직 내가 '모시느냐 안 모시느냐'만 있을 뿐이다. '흰 그늘'이다. 이것이 나의 '실패학'이다.

매화를 그리는 데 다섯 가지 요령이 있다〔畵梅五要〕. '몸체는 늙고 줄기는 괴상하고 가지는 깨끗하고 잔가지는 힘차고 꽃은 기이하게 하라(體古 幹怪 枝淸 消健 花奇)'이다.
밝고 밝은 후천개벽의 큰 운수는 각각 제 나름나름으로 밝힌다고 했다(明明其運各各明―수운). 내 나름의 모심을 생각하고, 내 나름의 모심의 예술을 생각하고, 고색창연한 괴기와 추의 검은 등걸 위에 예언자의 깨끗하고 희디흰 얼음매화가 몇 송이 눈부시게 피어 '흰 그늘'의 '모심'이 한 호흡, 한 획에서 미친듯이 춤추듯이 이루어지는 그 한매(寒梅)를 나의 군자가 아닌 신선으로 세우고 거기에 난초의 군자와 달마의 선승을 더하며, 동이와 동학의 영적인 생명론 위에 인의론(仁義論)과 허공론(虛空論)을 다잡는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실패라 하더라도 그리 곡조 슬픈 실패작은 면할 수 있을는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회상을 마치는 글을 '실패학'을 들어 다시 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무슨 구체적인 계기라도 있었는가?
있었다.

첫째가 작은놈 세희를 면회하고 돌아오면서 각오한, '제대로 살다 가야겠다'는 아비로서의 슬픈 결심이었고,

둘째가, 세희 나이 또래의 붉은 악마들이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오리라던 나의 예언 그대로 이제 '촛불'로 되살아나 우리 세희까지를 포함한 젊은 그들이 바로 민족의 성배를 실현하는 역사적 주체라는 전망이 너무나도 확연하고 뚜렷하게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내 주위의 여러 좋은 아우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문화나 미학이나 '문사철(文士哲)'에 관한 나의 평소의 생각과 촛불들의 미래를 함께 서로 이어주어야 한다는 확신과 집념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의 마침글에서는 비가 오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눈풍년이다. 구슬프기보다는 숭고하고 심오하다. 내 속에 있는 진정한 희망의 정체가 바로 다름 아닌 이 추운 정월 초하루의 밤거리에서 고즈넉이 타고 있는 저 촛불이라는 사실, 이것이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와 낙관의 구체적인 근거요, 계기인 것이다.

향후 5년 안에 새로운 문화운동의 세 가지 당연한 과제 이외에 '모심'이라는 이름의 아담한 시적 산문집 한 권을 덧붙여 쓰고 싶다. 물론 그 내용은 생각하고 생각한 그 생각, '흰 그늘'이겠지만.
내 생애를 통틀어 더듬어 찾아온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라면 '모심', 즉 '侍' 한 글자라고 즉시 대답하겠다. 아마도 내 삶의 마지막 정리작업일 터이다.

오늘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몇몇 가수들이 잡담을 하며 노래도 부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다. 그런데 가수 몇몇 사람의 노래, 대중가요를 들으면서 웬일로 '보석'이라는 낱말이 슬며시 뇌리에 떠올랐다. 대중적 민중의 삶, 그 어설프고 고달픈 삶 속에 숨겨진 한 보석이 바로 저 대중가요들은 아닐는지?

옛날 술과 친구와 노래를 즐기며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아득한 옛날이다. 이제 나는 술도 담배도 마저 끊었고 따라서 노래도 아예 끊었다. 어떤 경우에도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작년 연말에 원주 시절의 선배 세 분과 인사동에서 밥 먹고 술 먹는 자리에서, 술이 한잔 돌고 나서 질펀하게 벌어진 노래판에서 단 한 소절도 떠오르지 않는 나의 먹통 가슴을 바라보며 나도 선배들도 기이한 슬픔에 잠긴 일이 있다.

대중적 민중, 카오스 민중의 삶에서 대중가요는 시보다 더 값진 시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보석일 수 있다. 나는 오늘 신효범과 이동기의 노래를 들으며 나의 모심이 이들이 부르고 또 빛을 내는 대중의 시, 민중의 보석, '대중가요'까지도 깊이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신문을 보니 조용필 아우가 상처(喪妻)했다고 한다. 슬픈 일이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저는 대중가수예요"였다. 자기를 낮추는 말이었다.
거기에 즉각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대꾸한 나의 생각은 도리어 나와 대중을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감옥 안에서 숱한 도둑님들이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중들에게 큰 빚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매우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러나 작년이던가, 그가 자기 콘서트에 와달라고 전화했을 때 바빠서였지만 냉정하게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그렇다. 문상을 가야 한다. 내일이든 모레든 꼭 가야 한다.
왜?
그의 노래를 듣고 상처를 위로받곤 하던 지난날들의 고마움을 '모시기' 위해서다. 더욱이 그의 노래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촛불〉이 아니었던가! 그의 '촛불'을 '홋불'로 패러디할 만큼.

그렇다.
'촛불'을 모시러 가야 한다.
폴 발레리의 난해한 시구들 중의 가장 대중적인 시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대신 이제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촛불을 켜라. 모셔야겠다."

단기 4336년(2003년) 계미년
양력 1월 8일 밤 7시완연한 봄날이다. 단기 4336년서기 2003년 양력 3월 20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반미.반전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도 반미 진영도 똑같이 새 삶과 새 세계에 대한 '뜻의 길'을 못 찾고 있다. 길을 잃은 것이다.

감히 한마디 하건대 '붉은 악마와 촛불'들에게서 바로 그것이 싹트고 열리고 불타기 시작한다. 감히 말하건대 아메리카와 전 세계는 이 젊은이들에게서, 젊은이들은 문예부흥과 문화혁명과 새로운 추(醜)와 숭고의 생명미학에서 이것을 밝혀야 한다.

긴 글 말미에 또 짧은 토막들을 여럿 붙여놓은 것도 바로 이들의 콜라주 같은 해체적인 토막 몸짓의 의미를 생각하느라고 튀어나온 것이다.
그 동안 나도 여기저기 온갖 곳이 다 아팠다. 비트켄슈타인과 니체, 횔덜린과 고야, 알튀세르와 고흐 등을 애써 생각함으로써 아픔을 넘어서곤 했다. 환각도 사실이며 환상도 그 나름의 삶이다. 병원에서 한 달간 여기저기 이상한 곳들을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치료를 마친 뒤 회고록의 마지막 교정을 끝냈다.

붉은 악마가 강인한 생명력을, 촛불이 고즈넉한 영성의 경건함을 내게 일깨웠다. 참으로 커다란 배움이었다.
모심이다. 결국 '모심'이라는 한마디에 나의 삶과 세계에 대한 앎을 집약할 수 있게 된 오늘까지의 삶이 꼭 실패만은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긍정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그늘, 어둠의 눈부심, '흰 그늘'이 곧 그 푯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만 그치자.

4006년(2003년)
3월 20일제목을 정하는 데도 망설임과 가로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똑 내 인생 같다. 지금까지, 지금, 아마도 지금 이후까지 나의 시업(詩業)에서 떠나지 않을 우주 저편까지 이어지는 흰 그늘의 길, 내 운명과도 같은 이 길을 제목으로 잡아야 하리라는 내 속의 울림이 들린다.
'모심'은 언젠가 내가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소책자로 정리해야 할 한 명상록의 제목으로 유보한다. 그늘, 흰 그늘, 그늘의 길, 이 역시 나의 운명이다.

단기 4336년(2003년)
양력 5월 14일 5시다시 더해야 할 짧은 말들이 있다. 며칠 전 공초(空超)문학상을 수상했다. '모심'의 속마음만 더욱 굳어진다.
공초 선생은 밤을 아시아의 미학이요, 종교라고 했다. 아시아의 밤은 인류의 오늘과 내일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밤인 채인 아시아가 밝아지고 있다. 그 대신 유럽이 주도했던 세계가 모두 다 자기 나름의 새벽에 부딪치고 있다. 우선 아시아로부터의 새 미학 창조와 참다운 종교의 깊이가 드러나야 할 시간이다.
그 첫 행위는 시, 즉 한 모금의 물을 떠 인류 앞에 바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그 일, 그 한 편의 시를 감당해낼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소명은 이미 정해졌다. 이 민족의 소명 말이다. 그러나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주의 사업이기 때문이다.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흰 그늘의 길이기 때문이다.

전쟁? 우리는 속고 있다.

단기 4336년(2003년)
양력 6월 6일
일산에서
김지하 모심.

김지하 시인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가 315회를 끝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합니다. 김 시인의 회고록은 프레시안 창간 당일(2001년 9월 24일) 연재를 시작, 시인이자 사상가인 그가 겪은 한국현대사의 현장과 이면을 새롭게 짚어 한국 지식계의 큰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프레시안을 위해 회고록을 집필해 주신 김지하 시인과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 시인의 회고록은 7월 초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3권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