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의 서문: 추(醜)의 미학**
지난 2년 여 절 순례 시들을 써왔다. 그 30여 편을 수묵과 함께 묶어 한 시화첩을 내놓는다.
젊었을 때 한 시화첩이 내 손에 있었다. 이탈리아 도보여행 시화첩으로 헤르만 헤세가 쓰고 그린 것이다. 시는 짧고 간결했으며 연필 크로키는 마른 붓맛〔渴筆〕처럼 몽롱하고 소산(疏散)해서 울적하고 스산하고 틈이 많았다. 가히 헤세 낭만주의의 작은 꽃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앙드레 말로는 흑백예술, 그러니까 영화, 소묘 그리고 수묵 등을 가리켜 '세계의 우울'이라고 했던 것 같다.
흑백화는 그 나름의 색채관을 갖고 있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흰 그늘'이다. 색채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여기에 대한 비난의 기조는 잠재적으로 모두 바로 이 '흰 그늘'에 연계된 것들이었다. 중국의 남종화(南宗畵)가 북종화를 보는 눈도 그렇다.
'흰 그늘'에 그림의 주안점을 두긴 두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 같지를 않다. 시 역시 태작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의 시도로서 읽혔으면 한다. 주된 시안(詩眼)이 선(仙)과 불(佛)의 결합상에 주목하는 점을 보아주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화개》의 애잔함과 슬픔을 넘어 선(仙)적 생명의 숭고함에로, 모순어법의 섬광과 촌철살인(寸鐵殺人)을 넘어 불(佛)적인 영성의 심오함에로 나아가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괴(怪)'와 '기(奇)'와 '추(醜)'를 도리어 시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 점에서 북극전(北極殿), 백학봉(白鶴峯), 광제국(廣濟局), 내소사(來蘇寺), 운주사(雲舟寺), 쌍계사(雙磎寺), 지장암(地藏庵), 청련암(靑蓮庵) 등은 다소 성공적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파품(破品)인데, 그렇다고 버릴 것까진 없겠다. 공색(空色)과 청탁(淸濁)이 함께하듯이 잘난 놈과 못난 놈은 반드시 엇섞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심지어 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시화첩은 도공(陶工)이 못난 놈을 망치로 쳐서 파품시키기 그 이전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려 한다. 이 또한 '추의 미학'이다.
사실 '추'를 통과하지 않으면 생태학과 무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마치 코스모스에 대비한 카오스처럼 기왕의 미학적 법칙과 비례, 이미지와 비유체계의 혼돈이 바로 '추'이기 때문이며, '추'라는 이름의 이 실패 언저리엔 그러나 '괴'와 '기'와 '골계(滑稽)'와 '제의(祭儀)', 그리고 '비장(悲壯)'이 가까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카를 로젠크란츠가 '추'를 통해 참다운 숭고미에 도달하고자 했듯이, 아돌프 루텐베르크가 '병(病)'을 통해 참다운 심오의 존재미를 획득하고자 했듯이, 그리고 추사가 '괴'와 '기'와 '졸(拙)'을 통해 참다운 '선불'의 세계, '산은 높고 물은 깊은(山嵩海深)' 지예(至藝)의 땅에 이르려 했듯이.
지금은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의 때다.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신화(神話)'와 '복고(復古)'와 '엽기(獵奇)'와 '명상(瞑想)'과 '환상(幻想)'과 '희극(喜劇)' 그리고 숭고비장의 생태학과 장엄한 생명의 세계관을 지향하고 동경한다. 미학혁명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 혁명은 추의 미학이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을 관통하면서 동시에 안팎에서 추진될 것이다.
오늘날에 필요한 생명과 영성, 생태학과 무의식, 에콜로지와 사이버네틱스, 리비도와 아우라, 주체와 타자,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새 차원에서 결합을 이루는 새로운 미학은 일단 하나의 추의 미학일 것이다.
돌아다보건대 《화개》는 '슬픔의 정치학'이었다. 그렇다면 숭고와 심오, 괴와 기, 생명과 영성, 이른바 추의 미학과 정치학의 새로운 관계는 무엇일까?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달마'는 불교의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요 '매화'와 '난초'는 그야말로 전실(典實)한 유학의 군자도(君子道)의 하나다.
이 시화첩의 시들이 선(仙)과 불(佛)을 만지면서도 영가(詠歌)와 게송(偈頌)과는 거리가 멀듯이, 그려진(그림이 아니라 친 것이지만) 달마와 난초와 매화가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 또는 장바닥으로부터의 초탈(超脫)에 일단은 관계가 있지만(그렇다) 동시에 사실은 관계가 없는(아니다) 점에서 새로운 문화정치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선천과 후천이 공존하되 후천 쪽으로 그 중심이 약간 기우뚱한 균형이야말로 후천개벽이기 때문이다.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이라는 개벽, 과거로 가는 부흥과 미래로 가는 혁명의 동시진행인 후천개벽 말이다.
이 시화첩을 내는 데는 최원식, 이시영 형들의 권고와 결단, 강일우, 김미애 두 사람의 노고, 그리고 멀리 베이징에 있으면서까지 디자인을 맡아준 안상수 교수의 공이 컸다. 특히 안교수의 디자인이 아니라면 꿈꾸기 힘든 출판이었으니 채색도 아닌 수묵을 시화로 성공시키는 일은 오로지 수준 높은 디자인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먹참선'의 새 과제는 매화다. 매화철에 맞춰 묶은 이 이상한 시화첩을 이제 내놓는다. 부디 이 시화첩 출간을 계기로 창비와 우리 출판계 전체에서 시화를 비롯한 좀더 높은 안목의 동서문예작품 퓨전 출판들이 이어지기를 빌어마지않는다.
단기 4336년(2003년)
양력 정월 초하루 아침 9시
일산에서
김지하 모심
***감악산 밑에 작은 놈을 두고 오며**
며칠 전 작은놈 세희가 입대하여 복무하고 있는, 포천 가는 길 감악산 밑 부대에 면회 갔다가 왔다. 피자를 먹고 콜라도 마시며 세 시간을 지내고 나서 돌아오려고 작별하는데 노을빛에 비친 세희의 에미령한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아직 아기로구나!'
속으로 되뇌며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언짢았다.
누군가 세희를 보고 걱정하며,
'너무 착하기만 해서 손해 볼라!'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고 지금이고 정반대의 말을 하고 싶다.
'착해야 강하다.'
작은놈 세희는 큰놈 원보처럼 대학을 보이콧했다. 괜찮다.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번에도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했다.
'제 할일 잘하고 예술가의 길을 가거라. 착해야 하지만 울지는 말거라.'
돌아오는 노을길. 걱정과 안심이 교차한다. 문산과 교하 벌판의 드넓은 공간 앞에서 마음속으로부터 세희에게 짧게 부르짖는다.
'모셔라!'
그 동안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하던 아이. 세희와 이제와 다시금 '부자유친(父子有親)'을 회복한다. 마음 밑바닥이 훈훈해왔다. 걱정이 안심이요, 안심이 걱정이었다.
세희는 취사병이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밥을 푼다. 또 속으로 한마디 한다.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다.'
작은놈의 입대로 그 애에 대한 나의 사랑을 회복하고 확인했다. 내 생전 처음으로 군대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만사가 새옹지마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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