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단기 4336년, 서기 2003년)**
계미(癸未), 양력으로 1월 1일, 정월 초하루다.
촛불시위가 지금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과 전국 각처에서 수수만 명이 밤마다 촛불을 켜들고 소파(SOFA), 즉 미주둔군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의 전면적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때론 미군철수 요구도 튀어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의사가 아니다. 또 때론 미대사관으로 쳐들어가자는 과격론도 일어난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군중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반미(反美)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이요, 죽어간 미선이와 효순이 두 영혼의 안위이며 앞으로 한미간에 마땅히 지켜져야 할 영성과 생명의 존엄인 것이다. 그래서 촛불을 켠 것이다.
촛불의 첫 제안자 김기보는 말한다.
"그래서 촛불을 켠 것이다. 촛불은 반미주의가 아니다. 촛불은 영적인 사건이다."
촛불이 본디는 반미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다 안다. 그러나 영적인 사건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두 죽음에 대한 진혼(鎭魂)인가?
그럴 것이다. 진혼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경건한 촛불의 제사다. 그러나 다만 진혼뿐인가?
초혼(招魂).
진혼과 함께 그들, 촛불을 켜든 젊은이들은 동시에 초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부르는 초혼이며 '불림'인가?
억울한 넋들인가?
그렇다.
그러나 아니다.
당연히 전쟁에 죽고 외침에 죽고 폭정에 죽고 가난과 질병과 굶주림에 죽은 억울한 넋들을 불러 위로하는 불림, 곧 초혼임은 사실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단순히 억울한 넋만이 아니라 민족의 넋, 그 혼의 지극함과 그 혼의 깊음과 그 혼의 슬기를 부르고 있다. 민족혼은 세계와 삶에 대한 민족 자신의 사상이며 민족 자신의 평화와 생명과 영성의 메시지이다.
그 넋을 부르노라. 하루 이틀이 아닌 보름, 한 달, 아니 한 해의 마지막까지도 내내 촛불을 켜든 것이다.
그 넋을 부르노라!
아,
이제야 알겠다.
촛불을 켜든 젊은 그들은 바로 다름 아닌 지난 유월의 '붉은 악마', 그들인 것이다.
그들이기 때문에 저토록 긴 시간을 촛불의 지극한 '모심'으로 민족의 넋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유월의 그들을, 그들의 그 유월의 깊은 넋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지난 유월 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무엇을 외쳤던가? 칠백만 명이 넘는 젊은 그들이 한 달 동안 밤낮없이 목 쉬도록 외쳐댄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 민족의 깊은 넋, 오묘한 슬기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① 엇박: 3박 플러스 2박, 불림과 장단의 결합.
② 치우(蚩尤): 유목과 농경의 결합, 무의식과 생태학, 디지털과 에코.
③ 태극(太極): 음(陰)과 양(陽), 역동과 균형, 혼돈과 질서의 결합.
지난 유월, 그들은 이 세 가지를 한 달간 밤낮으로 외쳐댔다. 밤낮으로 하나같이, 그러나 각각이 제나름 나름으로.
문득 두 가지 이야기가 잇달아 떠오른다.
둘다 유럽에서 나온 말들이다.
하나는 '빅 카오스(Big Chaos)'다.
'빅 카오스', 즉 대혼돈인데, 유럽과 미국의 거대 신문들은 틈이 있을 때마다 이것을 외친다. 현재 인류사회와 지구 자연은 대혼돈에 시달리고 있다. 금융자본주의 세계시장의 불안정, 빈국과 부국 사이에 점차 더 깊어지는 경제 격차. 생태계의 전면적 오염과 파괴, 끊임없는 기상이변이 그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인간, 사회, 자연의 치명적인 질병을 통일적으로 처방할 수 있는 탁월한 과학이 나와야 하는데 그 과학이 창안.발견되려면 인간, 사회, 자연 전 방면에 걸친 인문학적 처방으로서의 문화이론이 나와야 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려면 역시 세 방면에 대해 통합적인 탁월한 담론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담론이 가능할 수 있으려면 새 삶의 원형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원형의 예언'이다.
이미 고인이 된 독일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러시아의 브라바트스키에 이은 유럽 최고의 대신비가였다. 유럽 녹색운동과 유기농, 그리고 생명과 영성교육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작고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남겼다.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탁월한 영성을 지녔으나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폭정으로 끊임없이 억압당해오는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꿈과 이상을 내상(內傷)처럼 안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지중해 문명시대의 전환기에는 그 성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으나 그때보다 더 근본적 전환기인 현대에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 이제 그 민족을 찾아 경배하고 힘을 다하여 그들을 도우라."
루돌프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일본 인지학회(人智學會) 회장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嚴) 씨는 일본에 돌아와 문헌과 정보 등을 통해 샅샅이 극동을 살피다가 우연히 한국사와 동학사(東學史)를 읽던 중 문득 큰 전율과 함께 그 민족이 바로 한민족임을 깨달았노라고 나에게 직접 실토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실례는 '촛불'과 과연 무슨 실제적 관계가 있는가?
또다시 짤막한 대답이 떠오른다.
지난 유월에 외쳐댄 붉은 악마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세계사의 현재상황에 대한 처방이며 대답이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기이하게도 탁월한 문화이론, 문화담론의 중핵인 '문사철(文史哲)'의 집약이다. 첫째, 문학예술 및 감성적 인간조직〔人和〕 주체에 관하여, 둘째 역사사회 및 과학적 지리(地理) 조건에 관하여, 셋째 철학종교 및 영지적(靈知的) 천시(天時) 운수에 관하여 대답 처방하고 있는 것이다.
엇박.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가오고 있는 세계사적인 카오스 민중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카오스모스(Chaosmos, 혼돈의 질서)'라고 예언한다. 엇박, 즉 3박 플러스 2박은 혼돈 및 역동과 질서 및 균형으로서 태생적인 '카오스모스 문화원형'이다.
치우.
먼저 이제까지 동양 정신의 정수요, 우리에게 문화를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 것으로 돼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사실은 서로서로 주고받는 '다이나믹스'의 관계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치우는 동이족의 부국연맹체 추장으로서 중국의 화하족 추장인 황제와 74회의 혈전을 벌인다.
이 전쟁은 농경문명 일변도를 주장하는 중국족과 유목이동문명과 농경정착문명의 교호결합을 주장하는 한민족연맹체 사이의 문명 및 세계관 전쟁이다. 현재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 역사, 사회, 지구지리적 흐름은 유목이동문명 일변도이고 반(反)세계화와 제3세계 국가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유기농적인 농경정착문명에의 일변도적인 복귀를 주장한다. 유월의 붉은악마나 치우를 로고화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인류의 미래문명이 '유목-농경의 복합형태'이어야 한다는 과학과 문명 원형의 예언을 뜻한다.
태극.
태극기는 동양철학의 집약이요, 동양과학의 꽃이라 할 《주역》 64괘를 모두 압축하는 네 괘〔四卦〕와 상하로 서 있는 중국적인 흑백 형상이 아닌, 좌우로 누워 있는 한국적 청홍 태극 형상으로서의 음양(陰陽)과 중도(中道)를 내포한 새로운 세계철학이 함축돼 있다.
여기에 네 정방(正方)이 아닌 네 간방(間方)에 벌여진 네 개의 그 괘상과 음양의 '배치', 즉 '계열화'의 형식으로 보아 김일부의 새로운 역학(易學), 즉 정역(正易)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럽적인 배제와 분단의 형식논리나 전쟁과 투쟁의 철학인 변증법과 러셀적인 논리계형(論理階形)까지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모순과 통합'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논리적 평화, 평화의 논리로서의 새로운 세계철학, 생명 및 영성의 통합과 선(仙).불(佛) 습합(習合)을 가능케 할 새로운 정신으로서의 태극, 또는 '태극궁궁'의 원형, 철학종교적 원형을 제시한 것이다.
지난 유월 나는 슈타이너와 다카하시의 예언이 망상이나 환상이 아님을 그야말로 큰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 그러나 역시 한 점 의혹은 남아 계속 마음의 하늘 한 켠을 배회했다.
물론 젊은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열기와 흥분과 역동 속에서도 길거리의 쓰레기까지 치우는 질서의식과 함께, 외국에 의해 패전하면서까지도 그들을 격려하는 관용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모순과 통합'이며 '아니다 이면서 그렇다'였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포츠였고 축제, 즉 태극으로 보면 양이었다. 흰빛 또는 붉은빛으로 불타는 생명이었다.
그늘, 음, 검은빛 또는 푸른빛, 제사 또는 문화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무엇이며 또 어떻게 나타날까? 이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여기에 드디어 대답이 온 것이다.
촛불!
촛불이다.
촛불은 제사다. '붉은 악마'의 거칠고 불타는 생명력, 그 축제에 비하면 보드랍고 고즈넉한 영적 사건, 즉 제사요, 음이요, 그늘이요, '밤에 켜는 제사로서의 촛불'이니 바로 '흰 그늘'이다.
촛불은 바슐라르의 물질신비주의의 영감의 원천이다. 촛불은 유럽문화의 골수인 기독교 신비의 중핵 '파스카(Pascha, 부활절)'의 상징이다. '자기를 태워 빛을 발하는 예수 희생제사'의 상징이다. 그것은 '넘어감', 즉 '통과'의 의례다.
'붉은 악마와 촛불'
마침내 현대 한국민중의 새세대문화의 신비는 아키타입(archetype)의 꼴을 갖춘다. 태극, 또는 '태극궁궁'의 음양통합이 나타난다. 붉은 악마 '치우'의 숭고함과 '촛불'의 심오함이 치우의 생명력〔外有氣化〕과 촛불의 무의식〔內有神靈〕이 통합된다.
아, 촛불!
나는 한동안 긴 침묵 속에서 혹시라도 내 생애와 촛불이 지닌 공유의 지점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내설악 백담사다.
몇십 년 전이던가?
어느 날 갑자기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나는 내설악 백담사 골짜기로 몸을 피해 숨어들었다. 그 골짜기, 밤이면 우렛소리를 내는 여울에 귀기울이며 좁은 방안에 한밤중 내내 타고 있는 촛불을 끝끝내 바라보면서 그 옛날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스님을 생각한 〈여울〉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시구가 띄엄띄엄 기억 위에 떠오른다.
'옛 만해의 아픔
가슴속 타는 촛불의 아픔'
'저렇게 소리지르네 애태우네
여울이 밤엔 촛불이 나를 못살게 하네'
'기어이 스스로 죽음으로밖에는
살길이 없어 가리라 매골모루로 가리라
아아 타다 타다가
사그러져 없어지는 새빨간 새빨간
저 촛불의 아픔.'
그래, 그리하여 나는 유신헌법과 박정희의 종신총통제에 전면반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갔고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을 선고하자 내 앞줄에 있던 김병곤, 지금은 고인이 된 그가 뱉어낸 한마디, "영광입니다."
이 한마디가 나를 소용돌이 속에 빠뜨렸다. 내 눈앞엔 끊임없이 타다 타다가 사그러져 없어지는 촛불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이었다.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도록 결정된 사람의 운명은 영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잠시 가석방되었던 기간 중 《동아일보》에 발표된 〈고행…… 1974〉이라는 기고문 안에서 그 전체 사건의 이름을 '촛불 신비의 고행'이라고 불렀으며 '정치적 상상력의 승리'라는 숨겨진 부제목을 붙인 바 있다.
촛불.
정치적 상상력.
드디어 붉은 악마는 축제의 한 형태인 스포츠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예민한 문화 중의 문화인 정치적 상상력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학생 때, 1973년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 2개 중대의 병력이 총 끝에 착검하고 수평으로 총을 겨누며 전진해왔다. 엉겁결에 손으로 칼날을 쥐어 손바닥을 베는 소동도 일어났다. 내 가슴 한복판에 와 멈춰선 시퍼런 대검 칼날은 내 안에 시뻘건 분노와 함께.
아, 그렇다.
그때 내 뇌리에 떠오르던 것이 있었다.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한마디였다.
붉은 악마들.
10대, 20대, 30대의 촛불들에게 지금 출렁이고 있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제사와 함께 떠오르는 정치적 상상력!
현대의 로마인 아메리카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촛불!
그러나 역시 김기보의 말은 옳다.
"그래서 촛불을 켠 것이다. 촛불은 반미주의가 아니다. 촛불은 영적 사건이다."
영적 사건.
정치는 정치로되 상상력의 영역이다. 그 상상력은 숭고와 심오의 제사.촛불로, '모심'으로 승화하면서 역설적인 영광을 촛불 세대 전체에게 안겨주고 있다.
그 영광은 도대체 무엇일까?
영광은 슈타이너가 예언한 바로 그 '성배'다. 그러하매 촛불 세대는 지금의 촛불을 통해, '붉은 악마와 촛불의 역설(패러독스)'을 통해 세계인의 새 삶, 지구의 새 삶, 민족의 새 삶의 원형, 그 패러다임이자 아키타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분명 반미다. '아메리칸 로마'에 거스르는 것은 모두 다 반미요, 반미정치다. 그러나 촛불은 결코 반미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이지만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상상력, 즉 제사다. 이 세상에 그것 이상의 성스러움이 없다는 점에서 제사, 즉 정치적 상상력인 '촛불'은 가장 거룩한 영광이다.
젊은 그들은 촛불을 통해서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계통적 기억을 통한 원형의 제시다. 지난 유월 원형의 본모습이 제시되었다. '엇박' 등의 '카오스모스 문화'가 '궁궁弓弓'이라면 태극기는 새로운 체계적 생명철학으로서의 체계적인 '태극'이다. '엇박의 궁궁'이 후천(後天)의 상징이요,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혼돈적 질서'라면 태극기의 태극은 선천(先天)의 부호로서 혼돈까지도 부분이긴 하나 제 안에 이미 포함한 새로운 세계철학인 '역학(주역과 정역)'이다.
바로 이 '태극이면서 동시에 궁궁'인 그 원형이 붉은 악마가 들고 나온 상징인데 이것이 바로 1860년 4월 5일 11시 경주 외곽의 현곡면(見谷面) 가정리(柯亭里)의 구미산(龜尾山) 밑 용담(龍潭) 계곡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내린 하늘의 원형이다.
그때 하느님의 계시 내용은 이렇다.
"나에게 '신령한 부호〔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신선의 약〔仙藥〕'이요, '그 모양〔其形〕'은 태극이요, '또 다른 그 모양〔又形〕'은 궁궁이다. 이 부호를 받아 병든 뭇 생명을 구제하라."
기독교에는 섭리라는 말이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하늘의 뜻〔天意〕'이라고 한다. 현대어로 바꾸면 무엇이 될까?
역사의 의지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역사의 신비요, 시대의 징표인데, 이것이 곧 성배다.
나는 지난 유월에 태극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궁궁을 보고 있다. 지난 유월에 태극의 양을 보았다면 지금은 태극의 음을 보고 있는 셈이라고 말해도 크게는 말이 된다. 아니, 그 반대라고 해도 괜찮다.
붉은 악마와 촛불 세대는 바로 그 새 삶의 원형인 '태극궁궁'을 세계 인류에게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을 대변한다.
지난 유월 전 인류 앞에 그들은 그것을 제시했다. 세계인들, 그들의 놀라움은 성배체험(聖杯體驗)을 내장(內臟)한 뜻밖의 놀라움이다. 아니, 그들은 아직도 그들이 왜 놀랐는가, 이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를 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메리카를 현대의 로마라고 불렀다. 아메리카의 대도시와 공항과 항만들은 세계의 축도요, 인류의 집합장이다. 아메리카의 능력은 그 크기와 능숙함으로 세계를 움직일 만하다. 다만 그들의 문화, 역사의식, 철학은 썩고 병들고 공허하다. 그들은 반대하고 싸워서 물리적으로 물리친다는 소아병적인 병법이 아니라 그들의 주체인 뇌, 즉 정신과 문화와 역사의식과 철학을 바꿀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함으로써 바로 그들을 통해서 세계를 바꾸고 지구 위에 생명과 영성의 새 문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촛불을 일러 '소아시아의 바울'이라고 하겠다. 아직 로마 전도 이전의 소아시아 도시들에서의 바울의 사상사적 위상이라는 뜻이다. 로마는 게르만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독교 때문에 붕괴됐다는 토인비의 말을 새삼 새겨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촛불은 아메리카와의 새롭고 창조적인 관계를 건설중이다. 정치적 상상력, 정치적 신비, 문화적 정치관 이런 것이다.
촛불은 미군철수 주장과 같은 극단적 반미주의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명백한 오류다. 왜?
첫째, 한미관계는 경제사회적으로 깊고 넓게 연결돼 있다 이 반도에 투자된 막대한 미국자본과 무수한 기업들, 그것과 함께 한미간에서 움직이는 무수한 기업가들, 이민들, 유학생들, 여행자들, 물동량들, 지석과 과학의 교류, 문화예술의 방대한 교류 등은 미군철수 등 극단적 반미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관념론인가를 깨닫게 한다.
둘째, 한미간의 정치군사적인 유착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즉각적으로 동북아 정세에는 불균형과 공황이 온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은 즉시 핵무장, 중무장, 군비확장과 함께 정치적 극우화를 단행한다. 중국은 이에 응해 즉각적으로 대대적인 군사비 증강과 신무기 증설을 강행하고 잇따라 남북한은 그 동안 축소를 꿈꾸어왔던 군비를 이번에는 거꾸로 대폭 증강하며 그로 인해 각 방면의 재정이 위축되면서 정치적으로는 우파의 득세를 부채질할 것이다. 남북관계는 즉시 냉전시대의 긴장으로 되돌아간다. 북한 당국까지도 미군철수 등을 강변하기를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혁개방이나 중국모델은 북한에게 있어 물 건너가는 소리밖에 더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도 대결과 갈등, 투쟁의 철학과 호전적인 대중문화만이 판치고 과학 역시 군사과학, 군수기술, 국방산업용으로 전화할 것이다.
셋째, 이 모든 현실 차원을 다 뛰어넘어서 나는 한미관계의 앞날을 1879년부터 1885년 사이에 공표된 충청도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 땅의 김일부 선생의 새로운 역학인 정역의 핵심을 이루는 '간태합덕(艮兌合德)'의 예언에서 찾는다.
'간태합덕'이란 무엇일까?
'간(艮)'은 산의 뜻인데, 정동(正東), 즉 한반도를 말하고, '태(兌)'는 연못의 뜻인데 정서(正西), 즉 미국을 말한다. 정역에 의하면 다가오는 새 시대에는 한국과 미국이 '사회적 구조변혁〔禮三千〕'과 '문화적 창조〔義一〕'의 상호협조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합덕(合德)'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양측 사이의 협조 내용인 변혁과 창조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주역에서는 '간태' 관계를 '산택통기(山澤通氣)'라 하는데, '산과 못이 기운을 합한다'는 뜻으로 최수운 선생의 시에 있는 '산 위에 물이 있음이여(山上之有水兮)'의 그윽한 비밀과 한가지다. '산 위에 물 또는 못이 있음'은 다름 아닌 '신시'의 비유로서 '거룩함과 장바닥의 합일'인 '호혜시장(互惠市場)' 또는 제사경제의 일종인 '포틀래치'의 상징이다. 고대 아시아의 호혜시장은 반드시 물이 있는 산 위에서 열렸다. 천지(天池)가 있는 백두산이 바로 신시의 터전이다.
'호혜시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인 우정과 모심 이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인 신비성과 생태계 보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교환구조로서, 제사와 상호혜택과 상업적 교환을 동시에 함축한다. 따라서 한미간에 이 같은 새로운 '호혜와 교환의 세계적 이중시장'의 창조적 구상이나 아이디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른지도 모를 일이다.
정역에 의하면 '간태합덕'과 함께 강조되는 것이 '진손보필(震巽補弼)'인데, 물론 해석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간태합덕'의 '정동-정서의 창조적 결합'을 측면에서 보필하는 역할이 중국과 일본에 주어진다는 해석의 가능성과 여지가 크다.
그런데 이 같은 정역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무엇일까? 주역팔괘를 대체하는 정역팔괘(正易八卦)가 그것이다.
정역팔괘가 곧 역학으로 본 원형인 셈인데 동학의 '태극궁궁'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정역은 동학의 역학적 전개다. 동학식으로 말하자면 삼칠자(三七字) 주문의 맨 마지막 완성 종료 부분인 '만사지(萬事知)'의 그 '만 가지 일〔萬事〕'이 다름 아닌 '수의 많음〔數之多〕'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주역 위에 겹쳐 정역의 출현을 예고한 것 같다.
왜냐하면 '공(功)'이 반드시 정치적 사태를 의미하는 동양사상사에서 '수(數)'는 반드시 '역수(易數)', 즉 '역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다〔知〕'가 곧 '스스로 공부해서 그 진리를 알고 또 앎을 하늘에서 받음(知其道 受其知)'이라는 점에서 독공(篤工)과 계시(啓示)의 합발(合發)의 결과인 김일부의 정역팔괘는 기왕의 문왕팔괘에 겹쳐(그 모양이 태극이고) 새로운 정역팔괘를 상징하는(또 다른 한 모양이 궁궁이다). '또', 즉 '우(又)'로 연결시켜 선천 태극, 즉 주역과 후천궁궁, 즉 정역이 공존하되 후천의 궁궁에로 그 중심이 기우뚱하게 기우는 선후천의 균형으로서의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역학과 괘상으로 벌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의 많음〔數之多〕'은 '역수의 여러 종류〔易數之各種〕'를 뜻하는바, 여러 종류란 주역과 함께 다른 종류의 역, 정역과 같은 새로운 역의 탄생을 예언한다. 하긴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이 이미 정역, 또는 간역(艮易)의 출현을 예고하고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역에서는 주역의 중핵인 '울려(律呂)'를 '여율(呂律)'로 뒤집어 놓았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전환이다. '율'이 '양'이라면 '여'가 '음'인데 선천 이천팔백 년 중국 주역시대의 율려는 양을 높이 들어올리고 음을 내리눌렀던 데 비해, 여율은 반대로 음을 높이 들어올리고 양을 도리어 조절하는 새로운 역과 우주질서의 이치이니 다른 말로는 '팔려사율(八呂四律)'이 된다. 음 또는 여성성, 카오스 등이 앞서고(여(呂)가 팔(八)이라는 점) 양 또는 남성성, 코스모스가 뒤에 서는(율(律)이 사(四)라는 점) 구조의 일대전환인 것이다. 역학으로는 여율, 즉 팔려사율이 삶의 아키타입으로 압축하면 '기형 태극 우형 궁궁(其形 太極 又形 弓弓) 바로 그것이다.
왜? 어쩌자고 어려운 역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는건가?
지식 자랑인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촛불들이여.
그대들은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알기 위해서도 서로 공부해야 한다. 내가 스무 살 때 4월혁명이 일어났는데 막상 그 주체였던 우리 젊은이들 자신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똑똑히 몰랐다. 5월쿠데타 이후부터 스스로에 대해서, 즉 민족과 민중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4월의 혁명적 의미를 깨달았고, 그래서 시작된 1963년의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와 1964년, 1965년의 한일굴욕회담 및 저자세 조약 반대운동으로부터 이른바 그 뒤의 민주화와 사회변혁, 민족문화운동 등의 씨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촛불들에게도 이제 똑같은 주문을 할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설명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상과 같은 나의 이야기들을 잘 활용해보라.
'소파의 전면적 개정' 이외에 촛불시위를 통한 새로운 한미관계는 그야말로 미국의 뇌수를, 그 정신과 문화를 뒤바꾸는 대개벽의 전초전인 셈이다. 소파는 개정하고 민족의 자존심은 살려야 하되 극단적 반미주의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
이젠 '소파'의 원만한 타결을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 씨에게 일임하라. 오늘이 정월 초하루다. 꼭 한 달이다. 그것이 슬기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주체인 촛불다운 태도다. 거리 시위를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그리고 노골적이고 장기적이며 격파 위주의 반미운동을 눈에 핏발을 세워 강변.강요하는 세력과는 차라리 결별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혹시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붉은 치우, 그 현명하고 용맹한 치우의 후예답게, 붉은 악마답게 촛불은, 그 거룩한 영광, 원형 제시의 길고 흰 그늘의 길, 바로 그 성배의 소명을 굳세게 지키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십수 년 전 전라도 해남에 낙향했을 때 《검은 산 하얀 방》이라는 이십여 편의 시를 구술하기 직전에 그 서시(序詩)로서 먼저 구술된 〈촛불〉이라는 한 편의 짧은 시가 문득 기억에 떠오른다.
그 시를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촛불
나뭇잎 휩쓰는
바람 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 애도 가버리고
금새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 소리냐 비냐.
4336년(2003년) 1월 1일
일산에서
김지하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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