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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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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11>

만해

시집 《화개》에 이어 실천문학사는 나의 사상전집 3권을 다음달에 출간할 예정이다.

그런데 며칠 전 놀라운 소식이 내게 날아들었다.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만해(卍海)문학상을 나의 《화개》에 주기로 결정했다 한다. 지용문학상에 이어 또 만해문학상이라니! 이것은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시상식은 11월 하순이라 하니 아직 멀었지만 수상소감은 7월 하순까지 써야 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고 받아야 할 것인가?

《님의 침묵》을 다시 읽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긴다.

붉은 악마와 월드컵의 대열정 직후다. 이른바 '님'이다.
'모로 누운 돌부처'다. 언필칭 '침묵'이다.

그렇다.

'님의 침묵'이다.

이제 침묵을 열고 님은 바야흐로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모로 누운 돌부처도 곧게 일어설 것인가?
돌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할 것인가?
어림없다.

그러나 소망마저도 어림없을까?
눈부신 저 '흰 그늘'은 영영 불가능할 것인가?
자주자주 '중력과 은총'을 생각한다.

그러하매 나는 님의 침묵 중에서 유독 '반비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흰 그늘'을 생각한다.
그러나 모로 누운 돌부처는 여전히 오래고 깊은 침묵 속에서 굳어 움직일 줄 모른다.
끝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일까?
나의 수상소감을 여기 싣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새로운 시작일까?

반비례에 관하여

나는 오늘, 대낮의 영광보다는 한밤의 고통이 더 깊은 한 문학상, 웅변보다는 침묵이 그러나 명백한 고통과 침묵임에도 그로부터 영광과 웅변의 빛이 스스로 배어 나오는 한 문학상, 바로 만해문학상 수상결정에 접하고 그 수락을 결단합니다. 혹 물으실 것입니다. 수락에 무슨 결단까지 필요한가라고. 까닭은 이렇습니다.

이 시집 《화개》는 우선 허름하고 어수룩하며 수월하고 부드럽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나의 시적인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명백히 말씀드려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 지나친 언어적 금욕주의 시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수락을 결단한 것은 이 시집 안에 나의 새로운 시학적 명제인 ꡐ흰 그늘ꡑ의 단초가 여기저기 싹트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결단은 이 새로운 시학에 대한 각오 위에 터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수상 사유 또한 이 점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나는 오늘, 한 송이 꽃이 피어날 때 온 세계가 다 일어선다는 그 한 소식에 관한 몇 마디 말로써 수상과 수락 결단의 소감을 대신할까 합니다. 그것은 '반비례'와 '흰 그늘'에 대한 말입니다. '흰 그늘'은 그 자체로서 모순어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음양법이요 연기법이며,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생명논리입니다.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은 '흰 그늘'이면서 '반비례'입니다. 먼저 스님의 〈반비례(反比例)〉를 앞에 겁니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흑암의 흰 얼굴, '백암(白闇)'. 하얀 어둠. 광명인 그림자. '흰 그늘'은 '반비례'입니다.
그러하매 생각해봅시다. 고통의 어둑어둑한 그늘이 결여된 밝은 희망의 흰빛이 공허이듯이, 신성한 생명의 흰빛의 생성과 절연된 죽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집착은 맹목입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 빛나는 저 유월개벽의 나날들, 거리를 가득 메운 저 젊은 군중의 함성 속에서까지 검은 중력장과 흰 초월성의 '3박 플러스 2박의 엇박', 그 '흰 그늘'을 보고 들으며 또한 그 '반비례'를 듣고 봅니다.
민족은, 민족의 모든 개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님의 침묵의 시대가 아닌, 님의 침묵의 모순어법에 가까이 그리고 '흰그늘'의 지혜에 가까이 있으며 '반비례'의 역동 속에서 춤을 춥니다. 왜냐하면 민족은 바야흐로 자기의 젊음 속에서 반비례하는 고통의 광명, 침묵의 웅변을 스스로 맞이하고 스스로 발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리거리에 가득 찬 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그리고 저 '역동적 균형'의 '카오스모스'인 '엇박과 치우와 태극'은 이제 민족과 새 세대의 새롭고 웅숭깊은 문화적 코드로 되어가고 있으며, 장차 그것은 온 인류가 앓고 있는 집단적 정신분열의 치유와 통합에 대한 결정적 처방으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난날 '검은 산'과 '하얀 방'의 깊은 분열로 긴 세월을 고통받았으며, 3년 전 어느 한 날 '흰 그늘'의 묵시黙示 속에서 통합과 치유의 가능성의 빛을 보았습니다.

'흰 그늘'은 도무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순이면서 통합입니다. 만해 스님의 그 '님'이 아픔이자 기쁨이고 '모심'이자 '살림'이듯이, '흰 그늘'은 '소롯한 예절'이면서 '힘찬 생명력'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우주로 열리는 고요한 삶의 '화개'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주 자체의 혁명적 '대역사'입니다.

'흰 그늘'은 그 현대적 전개과정에서 동이적 상상력의 알심이기에 나아가 농경정착적인 생명의 에콜로지이며 또한 유목이동적인 영성의 디지털.사이버네틱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바, 세계를 품에 안은 남북한 민족과 동아시아의 새 문명, 대륙과 해양 그리고 세계의 남과 북이 교류.교차하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서로 교합(交合)하는 새로운 후천세계(後天世界)의 구체적 창조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너는 너고 나는 나로되, 너와 내가 서로 얽히듯, 이미 지양(止揚)이나 해소(解消)가 아닌, 그러한 공존.동거의 '얽힘' 속에서 통합의 새 차원을 모색하는 자유와 평등, 인권과 복지는 물론, 신비와 과학, 신화와 역사, 환상과 사실, 명상과 변혁,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상생과 상극, '아니다'와 '그렇다', 그리고 당연히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또한 그 '얽힘 속에서' 통합하려는 '활동하는 무(無)' 곧 '태극이며 궁궁'일 것입니다.

이 '흰그늘'은 본디 우리의 풍류, 우리 민족미학의 한 핵심원리로서 윤리적 삶의 패러다임과 미적 창조의 패러다임 사이의 당연한 일치를 요구하며 '천.지.인'의 삼재에 대응하는 영성.이성.감성의 삼자 결합을 요청합니다. 그러하기에 '흰 그늘'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을 통일하고 그 체(體)인 황극(皇極) 속에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통전하는바 그 용(用)인 율려(律呂)의 숨은 '무늬'요 드러난 '아우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2박'인 '아래로부터의 기제'와 '위로부터의 기제'를 오늘날의 '3박'인 '삶.사람.살림'의 생명운동 속에서 새롭고도 오래된 '엇박'으로 통합하는 문예부흥.문화혁명의 한 메타포가 또한 '흰 그늘'입니다.

'흰 그늘' 아래서 우리는 신비적인 내관(內觀)과 상수과학적(象數科學的)인 현상학이 서로 협동하여, 이미 성취된 오감통합(五感統合)의 매개에 의해 새 차원의 깨달음에 이르는 대중적인 명상의 문화 또는 현실변혁적인 초월의 예술로 가는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문학은 마침내 디지털과 사이버 세계의 도전을 도리어 자기 안에 '반비례'로 흡수하면서 '흰 그늘'과 같은 컨텐츠를 쉼 없이 심화개혁(深化改革)하여 차원을 바꾸어가며 엄존(儼存)할 것이고 더 깊은 성실성, 더 넓은 실천적 경험과 더 높은 재능으로 동아시아 주도의 문예부흥과 세계적 문화혁명의 중요한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민족문학은 이제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도 양과 형식 방면만이 아닌 문학.역사.철학이라는 질과 내용 방면으로부터 그것을 포용하면서 도리어 새로운 우주적 차원으로 비약하는 새 시대의 새로운 정보체계, 새로운 결승(結繩), 새로운 역(易)을 창조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민족문학이 겪는 고통은 바로 그 정보체계, 그 결승, 그 역의 흰 빛, 대광명을 창조하기 위한 '기름'으로서의 '그늘'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또한 '반비례'의 수더분한 역설로, 또는 그 오묘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민중의 저 허름하고 어수룩한 민족문학의 그릇 안에 담지 않는다면 그것을 결코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 통합이자 동시에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만해 스님의 시 〈나는 잊고자〉와 나의 시 〈短詩 하나〉는 운명적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갑니다.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잊고자〉 부분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하나〉 전문

운명적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간다는 것. 이것이 나의 만해문학상 수상의 또하나의 수락 사유이기도 합니다.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신헌법 공포 직후 내설악 백담사 골짜기에 피신했을 때입니다. 그때 만해 스님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여울 1〉이란 시올시다.

밤하늘 가득 찬 비구름 바람
산맥 모두 잠든 저기서 소리지르네

촛똥을 모아 가난하게 일군 불
아슴히 여위어가는 곁에 있어 밤새워 소리지르네

옛 만해의 아픔
가슴속 타는 촛불의 아픔

바위에 때려 부서져
갈 곳을 가러 스스로 끝없이 바위에 때려 부서져

저렇게 소리지르네 애태우네
여울이 밤엔 촛불이 나를 못살게 하네

백담사 한 귀퉁이 흙벽 위에 피칠 한
옛 옛 만해의 아픔

내일은 떠나
떠나 끝없이 나도 여울 따라가리라
죽음으로밖에는
기어이 스스로 죽음으로밖에는
살길이 없어 가리라 매골모루*로 가리라
아아 타다 타다가
사그러져 없어지는 새빨간 새빨간
저 촛불의 아픔

*매골모루: 조선시대에 대역죄인을 육시(戮屍)하여 토막토막을 나누어 각각 함경.평안.전라.경상 등 각 도의 남북단(南北端) '매골모루'라는 곳에 매장했음.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살려고 애씁니다. '반비례'올시다.
감사합니다.

단기 4335년서기 2002년
양력 7월 13일 일산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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