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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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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8>

묵란전

김민기, 김영복, 김영동 등 여러 아우들이 서로 의논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로, 혹은 한꺼번에 계속 조르기 시작한다.

회갑기념으로 난초전시회를 열자는 것이다. 봄부터 치기 시작해서 작품을 만들면 초겨울에는 충분히 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내가 더 걸작이다. 지금 타고 있는 '소나타'가 10년이 넘었으니 원주 가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 차는 '그랜저'가 좋은데 '그랜저' 살 돈을 벌어줄 수는 없느냐? 묵란전을 열면 그만한 돈쯤은 들어오지 않겠느냐?

나는 안다. 아내가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님을.

내 경우에는 그보다 매일 몇 시간씩 난초를 치게 되면 겨울까지는 그것을 낙으로 삼을 수 있겠고 오히려 기수련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를 듬뿍 사다놓고 매일 난초로 해가 뜨고 난초로 해가 지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한 해가 번쩍 지나갔다. 어느새 겨울이 되었고 마침내 묵란전을 열었다. 인사동 학고재화랑에서다.

무위당 선생 탓에 난초에 손을 댄 지 꼭 20년 만의 일이다.

누구에겐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내 난초를 진정으로 보려면 나의 지나간 일 년을 '피드백'해야 한다. 진짜 난초는 거기 어디쯤 피었을 게다. 어느 날 어느 시 내 마음에 잠깐 들어왔다 간 어떤 생각, 어떤 느낌, 어떤 빛깔, 어떤 리듬, 바로 거기 있다."

매스컴이 모두 움직였고 전시회는 성황이었다. 매일 인터뷰하고 사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아득히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달려와 나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전시 작품이 세 차례나 교체되었으니 총 80점이 나간 셈이다. 아내가 말하던 '그랜저' 값을 벌었고 또 얼마쯤 빚도 갚았다. 아내는 단 한마디 "고맙다"로 그쳤으나 나는 안다. 아내가 마음속으로 무수한 '고맙다'를 발음하고 있고, 그것이 그랜저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난초를 치느라 도리어 심신이 건강해진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그런 기쁨으로만 끝나는 것일까?

나의 난초, 소위 '바람의 항구'라고 부르는 표연란은 참으로 괜찮은 것인가?

손님이 뜸한 사이사이 몇 차례인지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내 마음에 짚이는 문제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다행히 전시회 직후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창작과비평》에 실린 《완당평전》에 대한 나의 서평에서 이렇게 그 해답들에 관해 썼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山崇海深)'로 상징되는 이 '괴(怪)의 길' 안에 민족미학의 허허한 옛 '홀로 변화하는 신의 선도(獨化之神仙道)'가 따로 있음은 아니던가!

나는 여기에 이르러서야 완당의 '괴'가 원효의 무애나 일심의 도, 또는 율곡의 이기학(理氣學), 남명의 경(敬), 수운과 혜강의 신기(神氣)의 철학에 맥맥이 관통하고 드디어는 다석(多夕)과 함석헌, 그리고 그 위로 심지어는 진경산수와 송석원(松石園) 시풍에까지 이어지는 동이선도(東夷仙道)의 미학적 핵심인 것을 알아차리며, 지난 전시에서 드러난 나의 험들이 종내는 완당의 이같은 선예(仙藝)의 맥을 놓친 데에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묵란으로 문인화가임을 자처하고 내 나름의 달마도(達摩圖)로 머리 검은 사문(沙門)임을 뻐기어왔다. 그러나 유.불.도, 기독과 진취적 과학의 알심을 가로지르는 선취(仙趣)를, 청산에서 백학(白鶴) 놓치듯, 깜박 잃었으니,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는가? 완당에 대한 이십 년의 공부 끝에 유교수가 발견한 바로 이 '괴의 미학"에서 나의 지난 '험'과 '문제'를 극복할 새 단계의 핵심 해답을 얻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는가? 소위 태극과 같은 모순과 일치의 동시어법, 생극론과 중도(中道), 그리고 '아니다〔不然〕, 그렇다〔其然〕'의 생명논리, '모심(侍)'의 미학이 그것 아니던가?

그리고 며칠 지나 인사동 이화문고에서 매입한 난보 두 권 중에 단 한 점, 명나라 때의 승려 백정(白丁)이란 이의 난초 한 점에서 그 일탈한 듯한 일획(一劃) 표연란의 한 원형을 찾아내었으니, 그야말로 '흰빛〔白〕 나는 검검한 고무래〔丁〕' 혹은 그저 '백정의 난초'일 것이니, 이것이 곧 '흰 그늘'로서의 나의 새 난초요 왈 선란(仙蘭)일 터이다.

나는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한 생명문화운동 5개년 계획을 아내를 위해 착상했는데, 이 계획을 뒤에서 돕다가 5, 6년 후엔 시골로 가 자그만 흙집을 짓고 들어앉아 시와 난초로 여생을 마칠 것이다. 그 이전에 우선 4336년 가을에 한매전(寒梅展)을, 그 이태 뒤인 4338년에는 달마전(達摩展)을, 그리고 그 이태 뒤인 4340년에는 다시금 묵란전을 열어 다 마친 뒤에 낙향할 작정이다.

이렇게 한가롭고 개운하게 한 채 자그마한 흙집 같은 노후를 작정하고 난 뒤의 청명한 마음, 이것이 백정의 난이요 달마요 한매가 아닐는지!

그리고 그것이 곧 선예의 길은 아닐는지! 생명과 무의식의 숭고와 심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山崇海深)'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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