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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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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4>

아내에게

지난 달 펴낸 나의 여덟번째 시집 《화개(花開)》 속에 〈아내에게〉라는 시가 있다.

내가 뒤늦게
나무를 사랑하는 건

깨달아서가 아니다
외로워서다

외로움은 병

병은
병균을 보는 현미경

오해였다

내가 뒤늦게
당신을 사랑하는 건
외로워서가 아니다
깨달아서다.

외로워서가 아니다
깨달아서다.
무엇을?
아내만이 아내라는 것
아내는 하늘이 정한다는 것.
아내 이외에는 외로움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또 있다. 그러나…….
아내는 장모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원주의 토지문화관에 관장으로 일하기로 결정되었다. 잘된 일이다.
아내는 일 주일에 거의 반은 원주에 가 있다. 잘된 일이다.
아내는 사회에 봉사한다는 공적인 마음 하나로 그 일에 임하고 있다. 더욱 좋은 일이다.
아내는 나의 외조(外助)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땅한 일이다.
왜 이렇게 모두 다 '잘되었다' '좋다' '마땅하다'뿐인가? 수상하지 않은가?
환상 속에서지만 잠에서 문득 깨어보니 내가 찾던 이사(夷史)가 바로 내 곁에 있는 아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곧 마고(麻姑)를 부활시키는〔復本〕 '동이다물(東夷多勿), 한민족의 뿌리 찾기'의 주인공인 '이사(夷史)'인 것을 내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뒤늦게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죄송하다.
공부가 늦어서다.

그가 관장으로 가게 되면서 나는 마침내 내 마음에서 칼을 내렸다.

세상에 공헌하자는 욕심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관장으로서 그가 많은 일을 뒤에서, 곁에서 해당사항이 있을 때마다 극진히 도움으로써 도리어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공로에 대한 욕심을 극복하고자 칼을 내린 것이다. 그는 철저한 공심(公心)이다. 그러하매 문화관의 방향이기도 한 생명문화운동의 모든 기획과 모든 공과 모든 성과와 모든 사람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반드시 문화관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여러 일, 여러 사건들, 여러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곧 다가올 것이다. 그를 도우며, 아니 마고복본(麻姑復本)의 다물(多勿)을 조금씩 돕는 일, 문예부흥, 문화혁명, 추와 괴의 미학 등 후천개벽을 내가 내 나름으로 도움으로써 조용한 가운데 그를 돕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이다.
그리고 또 내가 할 일.

나만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시 쓰고 글 짓고 그림 그리는 일이다.

아아, 이렇게 칼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오류와 하자를 범해왔던가?

페미니즘이라는 유행어를 쓰고 싶지는 않다. 또 거기에, 그 반열에 끼일 사람도 못 된다. 아내의 일은 바로 이제껏 내가 하고저 했던 일이어서일 뿐이다. 후천개벽 말이다. 후천개벽만이 아내의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사'는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 그의 길이 곧 '이사의 길'인 것이다. 거꾸로 '이사의 길'도 바로 그의 길인 것이다.

아내가 원주에 갈 때 즐거운 마음으로 밥 짓고 설거지하는 이 모든 날의 변화, 그리 큰 변화도 아니지만, 여하튼 변화라면 변화인데, 이것이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그가 이사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내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단순히 외로워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언하고 보니, 외로워서인 것도 같다. 시인하마.

외로움은 병이고,
병은 병균을 보는 현미경.
오해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시인하마.
이 지점에서 또 한 번 칼을 내린다.
기억이란 재구성 행위다.
그러하매 회상이란 그저 까발리는 게 아니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읽으며 환상이나 기억 재구성의 의미, 그 근본적 의미를 깨닫는다.
기억과 회상의 주체는 의미를 추구하는 마음, 즉 진화의 '자기 조직자'다. 자기 조직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선택이다. 거기에는 선악이 없다. 일부러 까발리는 것이 회상은 아니다. 거기에서 선택하는 자가 숨은 자기 조직자다. 그가 누굴까? 그가 신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가 아무런 얘기나 마구 하도록 놔두지 않고 때로는 기억하고 말하는 나를 제약하는 걸 느낀다.

역시 오해였다.

이제 새삼스레 새로운 각오로 회상에 임한다.

기억이 회상을 주도하는 것만도 아니다.

회상을 주도하는 것은 다른 이다.

또한 오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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