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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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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301>

등탑암

맑은 날은 대마도까지 환히 보이는 해운대 언덕 위에 불 켜진 등탑이 하나 서 있다. 등대가 길 잃은 뱃사람들에게 북극성 노릇을 하듯 등탑은 참 삶의 길로 나그네를 인도하는 난야(蘭若)인 셈이니 곧 절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암(庵)'이다.

숙일스님의 등탑암에 내가 묵기 시작한 것은 눈이 시작되는 철. 새빨간 동백처럼 남쪽이 비로소 남쪽다워지는 초겨울 어느 날이었다. 등탑암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단 하루도, 짧은 잠시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묵상과 글쓰기와 아침저녁 수련에 몰두했다. 아침저녁 수련은 우주만물 만상의 종시를 모두 내 안에 모시고 그대로 살리는 별수련과 율려춤이었고, 글쓰기는 이사의 역사운동, 신시의 세계 계운동의 핵심을 《천부경(天符經)》과 동학적인 생명문화로 꿰뚫는 글, '부용'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목은 '옛 가야에서 보내는 겨울 편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이 책은 재미가 없다. 내 스타일에 안 맞는 것이다.

묵상은 역(易)에 관한 것으로, 등탑에서 어느 날 낮에 불쑥 나타나 오래도록 심안(心眼)에 머물던 새로운 팔괘였다. 그것은 복희 팔괘도, 문왕 팔괘도, 정역 팔괘도 아닌 제4괘도였다. 남과 북이 리(離)와 감(坎) 괘인 것은 《주역》과 같고 정동과 정서가 간(艮)과 태(兌) 괘인 것은 《정역》과 똑같았다. 그러나 서남과 동북에 건(乾)과 곤(坤) 괘가 있고 동남과 서북에 진(震)과 손(巽) 괘가 있는 것이 복희나 문왕이나 《정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법광(法狂)이 됐는가? 미쳤는가? 아니면 계시인가? 어찌 되었거나 팔괘의 내용만은 놀랍고 놀라웠다.

우선 그 괘도의 이름을 '등탑 팔괘'라 짓고 괘도에 시를 붙이되 해월에게 보낸 수운의 옥중시로 하였다.

등불이 물 위에 밝게 비치니
아무러한 혐의의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나무의 형상과 같으나
그 힘은 아직도 남음이 있네
燈明水上 無嫌隙
柱似枯形 力有餘

왜 이 시를 〈등탑팔괘시〉로 붙였는지 그 연고를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때는 무슨 절실한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에는 그 기억이 없을 뿐이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해월 선생 왈, "후천이란 선천이 후천 되고 후천이 선천 되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후천이 새로운 중심임은 분명 새로운 중심이되 오래된 옛 중심인 선천을 폐기․단절하지 않고 도리어 양천이 오묘하게 탈중심으로 동거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첫 구절이 후천의 《정역》 팔괘를 예언하고 뒷구절이 변함없는 선천의 《주역》 팔괘를 언명한 것일까? 아니 그럴까?

그리고 그 관계는 '없음〔無嫌隙〕'과 '있음〔力有餘〕'이니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교차 이치, 우주 및 생명의 차원 변화 논리인 것일까? 아니 그럴까?

남북의 리감(離坎)과 동서의 간태(艮兌)가 선천 《주역》의 태극과 후천 《정역》의 궁궁이라고 하자. 수운 계시의 핵심인 새 삶, 새 세계의 원형 '태극궁궁(太極弓弓)'의 팔괘 및 역학적 반영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럼에도 복희, 문왕, 일부의 세 역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건곤진손 괘가 보이니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함인가? 혹 《주역》과도 다르고 《정역》과도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시절의 인간과 우주의 기이하고도 괴상한 복합적인 새 변화를 말하는가?

남포동 책방에 가서 아산학회에서 펴낸 포켓북 《역경》을 사다가 매일매일 들쳐보며 묵상하고 묵상해봐도 내 《역경》 실력 따위로는 그 이상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아니, 더 못 나간 것이 도리어 다행일 듯도 싶다. 요사이 《역경》을 조금씩 공부하다 보니 절대로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ꡐ역ꡑ이요 절대로 쉽사리 끊고 맺어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역'임을 사무치게 알겠다.

아아, 그러나 소위 '등탑팔괘'가 선후천의 교체기인 지금, 《주역》과 《정역》을 종횡의 뼈대로 하되 혹시라도 《주역》이나 《정역》과는 또 다른 어떤 역적(易的)인 현실의 개입이나 인간의 욕구나 행위에 의한 새로운 삶의 우주적 가능성을 개진한 비의(秘儀)는 아닐는지?

그렇지만 확신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주역》도 《정역》도 전공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주역》이 이미 공자의 〈십익(十翼)〉 〈계사전(繫辭傳)〉 안에서 후천개벽의 계시를 예언하는 것이라면, 《정역》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요, 그렇다면 《주역》과 《정역》의 관계를 밝히는 역학적 원리도 있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망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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