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속에, 저 숲속에 내가 지나온 길이 나 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 나를 싣고 온 자동차 바퀴 자국도 있을 것이다. 그 자국 위에 누군가 알코올로 새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부용芙蓉으로 간다"라고.
그렇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온 길을 알려놓고서 부용에 머물렀다.
사실 나는 매일 누군가를 기다렸다. 자취를 감추면서 흔적을 남겼고 흔적을 없애면서 자취를 드러냈다. 나는 뱀처럼 꼬불꼬불 기어왔다. 내 자취는 꼬불꼬불할 것이다. 누군가 그 자취를 보고 뱀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면 성공이다. 내 사건의 이름은 '뱀 사건'이니까. 뱀을 방에다 집어넣은 사건이다. 그것도 독사, 살모사만 오천 마리를. 오천 마리가 매일매일 새끼를 쳐서 며칠 만에 오억 마리가 되었다.
뱀들은 그 독으로 방을 해체시켰다. 방은 사라졌다. 그때부터 확 터진 흰빛 속에서 환상이 시작되었다. 뱀의 환상.
나는 처음에 그 뱀을 여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어 그 여자를 역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며칠 뒤, 부용산 아래 기도 드리던 날, 그 귀퉁이 흙방 안에 최수운, 김일부, 강증산의 축전이 꽃다발처럼 답지하던 날, 나는 마침내 그 여자를 '이사夷史'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마지막 삶의 밑둥'이라고 불렀다.
'이사'는, 그러나 결국엔 하얀 환영이었다. 부용산 아래서였다.
산 아래
물가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이 왜 푸른가를
생각한다
아무도
곁에 없다
올 것 같지도 않다
왔다 간
흔적조차 없는
빈 자리
너는
환영처럼 거기
서 있다
희다
너의 이름은
夷史,
잃어버린 東夷族의
아득한 넋
내
마지막 삶의
밑둥이여!
〈이사〉라는 시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고 받드는 순간, 그 여자는 '이사'가 될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남자를 유혹하는 한 꽃뱀이었다.
'이사'를 그 여자에게서 떼어냈다. 그날 밤. 새카만 원피스를 입은 독한 미모의 중년 여인이 내게 왔다.
나를 내내 노려보더니,
"너……."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됐어!"
그랬다.
"나는 창녀야! 너는 창녀를 사랑하고 있어! 그럼 된 거야! 이사는 창녀야! 함석헌이 뭐랬어? 조선 민족의 역사는 늙은 창녀의 역사랬지? 소름 끼치는 상징이야! 사랑을 직업으로 한 자는 저주받은 자야! 그것이 '이사'야! 너는 이사를 사랑하고 있어! 그럼 된 거야! 왜냐하면 조금 후엔 이사가 천문과 역사와 음악의 덩어리임을 알게 되니까."
나는 시무룩해 있었다.
그 여자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내게 말했다.
"나는 할미야, 마고 할미! 나는 돌아간다. 너에겐 이전의 뱀과는 다른 아리따운 새로운 젊은 이사가 올 거야! 그 이사와 함께 너는 남쪽으로 가야의 옛 땅으로, 솟대로 가야 해! 이사의 흰 모습이 너와 함께 갈 거야! 그러나 아직 멀었어!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남아 있어!"
사라졌다. 그리고 부용 아래에서 흰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깊이깊이 한님께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새벽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새로운 '이사의 길'을 열기 위하여!
한 님 앞에
뜬눈으로 긴 밤을 새우고
신새벽에
남쪽으로 간다
해는
저기 있고
달은
여기 있다
아직 별들도 남아 있다
내 마음과
몸 안에
모두 있다
네 눈빛도
사랑아
옛날 그 불꽃이었던 사랑
그도 와 있다
이제껏
울며 지나온 땅들 그리고
헤어진 벗들
이제부터
가야 할 머나먼 길의
가로수 이파리들
그 위의
바람들
모두 있다
살아 있다
신새벽 푸른 공기
그 속에, 내 마음과
몸 안에
숨어 계신
한 님과 함께
빙긋이
저기서
미소짓고 있다.
새로운 '이사의 길'을 열기 위하여 나는 어느 날 새벽 문득 '부용'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남쪽으로, 가야로, 부산으로, 솟대로 가는 작전의 이름을 '부용'이라 지었다. 부용 아래서 처음으로 이사의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나는 먼저 경기도 이천군에 있는 해월 선생의 유고지 앵산鶯山으로 갔다. 앵봉 위에 소주를 붓고 이배 반을 올린 뒤 양백간兩白間으로 갔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는 물 맑고 바위 좋은 선유동으로 가서 그곳에서 김상덕, 박재일, 조희부, 이병철, 김윤칠, 김휘중이 모여 술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불렀다. 모두 이사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었다.
박재일 형이 취해서 한마디했다.
"이제부터 우리 서로 얼굴 보는 운동을 하자!"
내가 제안한 것은 '계契'였으나 아직도 그것은 논의중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인이 된 제정구 형의 가장 가까운 벗인 예수회의 존데일리, 정일우 신부가 사는 마을을 거쳐 옛 통일당 운동으로 투옥됐다가 나온,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어떤 사람의 농장으로 갔다.
담화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제부터 올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직접 생산해야 합니다. 아마 그런 시대에는 해월 최시형 같은 사람이 우리의 모범이 되겠지요."
답답한 얘기였다. 파시즘을 재평가하자던 일본인들을 또 만난 것 같았다. 중세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런 파시즘이 통할 수 있는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해월을 모범으로 하다니 당치않습니다."
이때 그가 혼잣말인 듯 왈,
"이 사람 정신이 덜 났군!"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투, 정보부 애들, 제1군사 대령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긴 여러 귀농주의자들이 비슷한 생각, 비슷한 말을 한다. 일종의 생태 파시즘인데, 이미 오래 전에 경고한 바 있는 경향으로 전혀 가당치 않은 얘기다. '이사'의 부드러움과는 너무도 아득히 먼 얘기다. 세상에 대한 어떤 깊은 원한이 숨겨진, 무서운 담론인 듯했다.
순천에서 YMCA의 이학영 아우와 쪽물 염색으로 유명한 한광석 아우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놀다가 여수 근처의 여자만 해변으로 갔다. 노을이었다. 투명한 물 저 건너 섬들 사이에서 어여쁜 새 이사의 커다란 모습이 흰 소복 바람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주적인 그 흰 춤을 등뒤로 업고 여관으로, 이튿날 여관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아우들을 만나 잠시 노닐다가 다시 부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섬진강 휴게소에서 저 먼 하늘로 떠나는 이사를 배웅했다.
아주 가는가? 아주 가는가? 순천에서도, 해남에서도 ꡐ이사의 길ꡑ은 환영받지 못했는데, 아직도 이사는 부활의 날이 까마득한데, 여기서 지금 떠나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숨겨진 차원으로 내면화하는가?
문득 내 몸과 마음이 죽은 거북등, 꼭 점치는 갑골 같았으니, 어둑어둑한 땅거미에 부산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서 글자 셋이 거북등 위에 나란히 하얀 불빛을 켜고 빛나기 시작했다. '등탑암(燈塔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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