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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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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9>

산에서

산에서 산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죽었다.

죽은 그 사람의 말을 타고 산에서 산이 내려왔다. 창이 뚫리고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내려앉았다.

눈과 혀와 성기가 뽑히고 콧구멍과 귓구멍과 똥구멍에는 말뚝이 박혔다.

물에서 물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은 병들었다.

병든 그 사람의 말을 타고 물에서 물이 올라왔다. 방구들이 뜨고 책상이 뜨고 지붕이 떴다.

바람이 바람으로부터 불어온다고 한다.

그리되었다.

불이 불에서, 나무가 나무에서, 엉덩이가 엉덩이에서 나온다고 했고 또 그리 되었으니 이 모든 일은 현실이다.

나는 한 마리 짐승.

그것도 잡아먹는 가축이다.

나를 각떠 죽일 백정들이 백정들 속에서 온다고 한다. 올 것이다. 틀림없이 올 것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표창을 잘 던지는 사람과 북을 잘 치는 사람과 목소리가 큰 사람이 배를 타고 왔다.

어디서 상엿소리가 천천히 느리게 들려온다.

우리는 한밤중에 배를 타고 퇴계원으로 갔다.

거기서 퇴계여관에 들었다.

흰 벽 위에는 붉은 성학십도(聖學十圖)가 그려졌다. 이 모든 일은 한 암거위의 자궁 속의 작은 혹에서 시작되었다.

그 혹을 떼어내기 위해 한 숫거위와의 교미가 시작되었다. 길고 긴 밤 내내.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았다.

나는 어느 숲속에 있다.

호숫가다.

희다.

나는 살았다.

아주 편하다.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의해서 꽃이다.

아무 일도 없다.

없다.

결국 그것은 사이비(似而非)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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