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심은 또한 그무렵 만사천 년 전의 마고(麻姑)로부터 천칠백여 년 전의 고구려와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동이(東夷)의 예술적 상상력과 역사의식과 종교철학적 사상이 어떻게 현대에 되살아나 미래의 아름다움과 세계사와 철학을 바꾸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바로 넓게 잡아 오만 년 전부터의 동이의 모든 문화사상이 근대의 동학역사에 어떻게 부활하느냐는 큰 문젯거리였다. 이것은 다름아닌 풍류선도의 역사, 곧 선사(仙史)공부인 것이니 동학을 포함한 동이 나름의 물질생명영성(物質生命靈性)의 진화사일 것이다.
동학사는 동이사상의 부활사이다. 최수운은 '오만년 다시 개벽'이니 '개벽시국초일'이니 '한번 간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無往不復)'고 했고 김일부는 일부사적(一夫事蹟)에서 자기의 법통이 태고대법(太古大法)인 하느님의 선도(仙道)임을 밝혔으며 강증산은 '원시가 다시 그 근본을 되돌린다(原始返本)'고 강조했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해 개천절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선국사(善國寺) 은적암(隱跡庵) 터에서 지내고 그곳에서 벗들, 아우들과 동학사 속의 동이사상문화사를 공부하는 삼남민족 네트워크를 구성하기로 했다.
은적암은 최수운이 경주에서 피신해 숨어 있던 곳으로 그곳에서 전라·충청의 혁명적인 남접(南接)을 최초로 조직하기 시작하였고 〈안심가(安心歌)〉라는 최고의 혁명적 개벽의 내용과 페미니즘이 연결된 가사 및 혁명율려인 '칼노래'를 지은 곳이다.
그의 혁명과 페미니즘과 칼노래 안에 어떻게 동이의 풍류와 동이의 마고와 동이의 율려가 새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부활했는가를 공부하자는 것이 남원 교룡산성에서의 삼남민족 네트워크의 2박3일의 개천절 행사였다.
서울보다는 삼남 전지역에서 2, 3백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은적암 터 아래 보제루(普濟樓) 마당은 발디딜틈 없는 초만원이었다.
동학사에 있어서의 은적암의 의미와 동이사(東夷史)에 있어서의 동학의 의미, 그리고 현대세계사에 있어서의 동이와 동학사상의 의미가 토론, 강의, 풍물과 탈굿 등을 통해 계속 탐색되었고 한국의 민중으로부터 국내외에 보내지는 성명서와 메시지들이 발표되었다.
젊은이들은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그런데 개천절 바로 전날 밤까지 추적추적한 가을비가 멈추질 않아 개천절 행사가 매우 걱정되었다.
나는 은적암에 오기까지 대전의 한의대에서 '치유와 율려'에 대해 강연하고 전주 모악산 아래 구릿골의 강증산 선생의 옛 광제국(廣濟局)에 들렸었다. 거기서부터 내 왼쪽 눈가에서 날개에 피가 묻은 웬 흰 나비 한 마리의 환영이 날기 시작하더니 개천절 바로 전날 밤 그 기인 긴 불면의 밤에도 내내 계속해 날아 삼남 전역에 깊이 내린 근대 백여 년의 피투성이 민중의 원한이 내 골수 속에 사무쳤다.
어이하리오?
어이하리오?
원한으로는 큰 일을 못 이루는 법.
전세계와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되돌리는 개벽의 일은 원한에 사무친 중독된 정신으로는 어림없는 법.
어이하리오?
걱정 걱정 끝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전북대학의 김익두 교수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성님! 성님! 날이 개었소! 날이 개었소! 하늘이 새파랗단 말이오!" 외치는 통에 눈을 떠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하늘가에 먹구름들이 몰려 있고 하늘복판이 그야말로 개천(開天)이었다.
아! 내 눈가에 날던 피묻은 흰 나비도 자취없었다.
"아!"
이것은 모든 입에서 한가지로 튀어나온 외침이었으니 다 한가지로 하나같이 심신탈락(心身脫落)이었다.
화창한 햇살 속의 보제루에서 우리는 박창암 선생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고 동학과 동이의 기본사상으로서 영성적인 '모심'과 생명의 '살림'으로 일관한 '님의 문화'를 강조하는 나의 마지막 기념강연이 끝난 후 산성을 내렸다.
아!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그날에 푸르른 하늘이 그토록 활짝이 열렸으며 그후로 오늘날까지 삼남민족 네트워크는 해남 김휘중의 핸드폰이 곧 사무실인 그 가난한 상태에서도 10여 회에 달하는 동학동이역사 공부모임을 유지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도 기억에 날카롭게 남는 것은 그 자리에 박창암 선생 같은 우익민족주의자와 수많은 내 아우들의 좌익사회주의가 그리고 동학꾼과 동이꾼들, 크리스찬과 불교신자들이 서로 격의없이 어울려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지향을 기꺼이 맑은 마음으로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날의 사상적 기억이 또한 바로 그 얼마 뒤에 집필되어 천도교측에 의해 발표된 〈한민족의 전통사상과 그 현대적 의의〉라는 장문의 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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