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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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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3>

안데스

일산에서 연대 가는 길목의 증산동 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한 골목어귀에 있는 신식전통찻집 '안데스'에 들어간다.

저물녘이다. 탁자마다 촛불을 켜놓고 남녀가 머리를 맞대고 차를 마시며 수군거린다. 이 집에서는 절대로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높이면 쫓겨난다.

한 구석자리에 앉는다.

종업원이 차와 함께 백지와 볼펜을 갖다놓는다. '안데스'라고 적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안데스'에 갈 수 있다. 물론 여비 일체를 선불해야 한다. 밤 10시다. '안데스'행 여객들만 남고 모두 빠져나간다.

10 시 5분에 비행기가 출발한다.

10 시 5분이다.

비행기가 출발한다.

밤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거쳐 캄캄한 한밤의 태평양 상공을 난다. 주위에 구름들이 몰키고 귀신들이 이마와 젖꼭지와 배꼽에서 푸른 인광을 내뿜으며 이리저리 이동한다. 기이한 음악에 따라 기이한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것이 빙하기 무렵의 몽골리안 샤만의 음악과 춤이라고 기내방송이 소개한다. 여객들은 자기 희망에 따라 그것을 흉내내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고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새벽녘 먼동이 터올 무렵 비행기는 남아메리카의 긴 태평양 해변쪽 칠레를 가로질러 안데스 고원 쪽으로 난다.

여객들은 꼬냑이나 보드카나 한국산 소주를 조금씩 마시고 멜론 조각과 쑥떡 한입과 마늘장아찌 두 개를 각각 받아먹고는 모두 입을 다물고 일제히 눈을 감는다.

인디안의 옛 음악이 피리소리로 흘러나온다. 눈썹과 털이 모두 새하얀 거대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나타나 울부짖는다. 흰옷을 입은 신선들이 날아오르기도 하고 날아내리기도 한다. 커다란 궁전마당에 모여 격식이 제법 까다로운 팔일무(八佾舞)나 무척 우람한 태평무(太平舞)를 추기도 하고 칼 열두 개를 휘두르며 검무(劍舞)를 추기도 한다. 발 밑에서는 걸음걸음마다 여러 가지 꽃들이 폭폭폭 피어난다.

안데스 산맥이다.

마추피추를 낮게 나르며 기내방송이 "드디어 고향에 왔습니다. 드디어 고향에 왔습니다. 웰컴 홈! 웰컴 홈!"을 되풀이한다. 비행기는 고도를 아주 크게 낮추어 산정 너머 한 사막에 내릴 차비를 한다. 비행기창으로 이미 공항에 나와 마중하고 있는 벌거벗은 인디언들과 팬티만 입은 신선들과 블라우스를 입은 방울뱀들과 투피스를 입은 늑대들과 턱시도를 입은 당나귀들이 보인다. 모두들 환영의 인사로 만세를 부른다. '무슨 만세'가 아니라 '그냥 만세'다.

비행기가 착륙한다.

공항에서 여객들은 모두 다 발가벗어야 한다. 몽땅 벗어버리고 맨발로 출구쪽으로 걸어간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탄다. 버스가 움직인다. 버스의 차내 방송이 말한다.

"여기는 행복의 땅, 지라르탈입니다. 지라르탈에서는 음식과 잠과 놀이와 섹스와 양귀비꽃잎과 술과 담배가 모두 프리! 프리! 프리입니다. 다 왔습니다."

여객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지라르탈! 지라르탈! 오오 영원한 양귀비꽃 지라르탈!"

노래노래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일렬종대로 사막을 향해 걸어간다. 방울뱀들이 꽃을 물고 쫓아오고 신선과 인디언들과 늑대와 당나귀가 모두들 노래 '영원한 지라르탈'을 부르며 쫓아온다. 피할 수가 없다. 길은 하나뿐. 모두들 한 우물에 당도한다. 그 우물에는 팻말이 꽂혀 있다.

'물 바람 우물.'

우물 속 깊은 곳에 있는 푸른 물빛이 손짓해 부른다. 하나씩 그 손짓에 이끌려 우물 속으로 뛰어든다. 마지막 한사 람까지 뛰어든다. 그리고 고요한 우물 주변에서 인디언들과 신선들과 방울뱀들과 늑대들과 당나귀들이 노래노래 부른다. "행복의 땅 지라르탈! 영원한 양귀비꽃 지라르탈 지라르탈!"

그곳이 바로 안데스다.

지라르탈이 바로 그곳이다.

촛불이 켜진다.

11 시 5분이다.

꼭 1시간이다.

이튿날 새벽 목이 말라 물을 찾아먹고 거실에 나와 조간신문을 펼쳐든다.

'김지하 시인 안데스 산맥에서 의문사(疑問死)!'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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