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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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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2>

슬픈 사랑

노을 무렵 한강변의 자유로에서 일산을 바라다볼 때의 첫 느낌! 노을에 타는 흰 아파트숲들!

어느 날 노을녘 한 환상이 찾아왔다. 무서운 환상이었다.

아, 아파트숲 저기에 나를 배신한 불륜의 여자가 숨어 있다. 예언자 미카처럼, 호세아처럼, 혹은 어쩌면 에레미아처럼 저주받은 숙명을 짊어지고 간다. 검은 수챗구멍같이 더러운 저 한 여자를 찾기 위해 남한 전역을, 낯선 도시들을 헤매다 헤매다 마침내 여기에 왔다.

나를 버리고 떠나간 창녀(娼女)!

오로지 돈과 쾌락밖에는 모르는 갈보!

그 창녀가, 그 갈보가 웬 남자를 끼고 누워 킬킬거리며 저 아파트 어딘가에 숨어 있다. 숨어 있다. 숨어 있다.

차에서 내려 붉게 타는 노을을 지고 천천히 걸어서 다가간다. 품에 품은 비수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마음에서 무수히 무수히, 아! 그러나 도저히 찌를 수는 없다.

그녀는 나의 여인!

한때나마 정을 주었던 여자!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그러나 죽일 수는 없다.

나의 예언은 여기!

죽여야 하지만 죽일 수 없는 창녀와의 슬픈 사랑! 그 사랑을, 침을 뱉으며 저주하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그 슬픈 사랑을!

아아, 타는 노을을 받아 도리어 더욱더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무한, 무한대로 허공에 확대되는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의 숲들! 더러운, 어두운, 시커먼 수챗구멍!

창녀의 자궁! 갈보의 자궁!

아아! 나의 예언은 여기!

여기서 용서하고 돌아서는 것!

비수로는 거꾸로 나를 찌르고

도리어 나의 분노를 찌르고

오히려 나의 두 눈을 찌르고

나의 예언은 여기 여기 여기!

사람들이 헤어지고 떠나고 떠나오는 고속버스 터미널! 귀퉁이 한 매점 앞에 쭈그려앉아 빵 세 개를 사서 아귀아귀 먹고 있는 나!

나는 떠나야 한다. 그리하여 먼동 터오는 호남, 저 뽀오얀 학명산천(鶴鳴山川)이며 새벽이 다가오는 영남, 저 푸르른 계명산천(鷄鳴山川)을 홀로 헤메이며 이제 막 솟아오르는 신성한 저 태양 앞에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외치리라! 그리하여 머언 먼 여로에서 고향에 돌아온 바로 그 고개 위에 만신창이 몸을 눕혀 죽어간 황진이처럼 그렇게 내 삶을 마치리라! 그리고 하늘이 아닌 하늘이 아닌 지옥에 가, 지옥에 가 분명히 거기로 올 그 창녀를, 내 아내를 기다리리라! 기다리리라! 지옥의 버스터미널에서 지옥의 그녀에게로 떠나리라! 떠나리라! 떠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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