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일산의 이층 아파트는 눈부신 흰빛이었다. 목동, 그 침침하고 컴컴한 넋, '쉰'의 어둑어둑한 그늘에 날카롭게 대비되는 흰빛이었다.
조명(照明)이 인간의 내적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산 새 집 들어
빈 방에
흰빛 난다
진종일 눈부시고
매미소리 뼈만 남고
어둠속 붉었던
살
자취없다
먼 강물
핏속에 흐르나
나 이제 벌판에서 죽으리
흩어져
한줌
흙으로 붉은 빛.
―〈일산 시첩 1〉
흰 빛 속에
홀로 있다
여름 구름 흐르고
아득한 곳
강물 흐르는 것 보인다
보인다
죽음이 곁에 있다
깊은 곳
마음 밑바닥
한 점 바람 일어
걷기 시작한다
만나러.
―〈일산 시첩 2〉
장자(莊子)에 '빈 방에 흰빛 난다(虛室生白)'는 구절이 있다. 써놓고 보니 그리 되었다. 이 구절은 설명보다도 느껴야한다. 아마도 '앉은 채 모든 것을 잊는(坐忘)' 수련의 결과 같은 것 아닐까?
<사진>
일산은 그때 아직 채 개발이 본격화되지 않았을 때이어서 여기저기 공터투성이에 양파밭, 콩밭, 해바라기밭이요 눈부신 갈대밭이 정발산(鼎鉢山) 자락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었다. 이사하던 해 가을, 많이도 돌아다녔고 많이도 썼다. 그러나 대부분이 폐기되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무렵 주장하던 '틈'이 너무나 크게 확대되어 허연 빛만 허공에 남고 말들과 이미지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는 상태, 그러니 그것을 엉성하다는 말로도 정확히는 표현할 수 없었다. 점차 '없음'에 가까워져 나중엔 한 줄이나 두 줄만 남더니 그것도 너무 많은지 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나 부사, 동사나 조사만 한두 마디 남은 채 백골이 돼버렸다.
새 시집 《화개(花開)》의 시편들은 그 훨씬 이전의 것들이고 이무렵의 것들은 《중심의 괴로움》에 실린 것들 이외엔 거의 다 폐기되었다. 이것을 무슨 현상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미 앞에 인용한 시 가운데에
보인다
죽음이 곁에 있다.
라고 했다. 과연 죽음이 곁에 있는 텅 빈 흰빛이었다. 목동에서의 침침하고 컴컴한 그늘, 넋의 어둑어둑함과는 정반대로 눈부신 허무요 흰 죽음이었으니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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