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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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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8>

*본 288회 '탑'은 누락됐다가 다시 게재된 10회분(274~283회) 시절에 대한 저자의 추가글입니다. 연재는 289회부터 계속됩니다. 편집자.

오늘 낮, 인터넷에 연재중인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를 한 아우에게서 전화로 들었다. 해남에서 환상에 휩싸이고 서울 목동으로 이사한 뒤로부터 소위 학생들의 집단적인 분신사태에 관한 칼럼을 쓸 때까지 내가 뭘 했으며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관해 아무 기록이 없어 궁금해 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만 앉아 생각해보니 귀찮더라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다. 친절하게 얘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순서는 없다. 아무 곳에나 삽입하면 되는 일이다. 이 회고록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서울의 목동으로 이사한 것은 아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일, 두 아이들의 교육문제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하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내가 서울로 가야만 환상 같은 섬세하고 까다로운 증세를 장기적, 심층적으로 진찰,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과 관련된 사건으로 말한다면 지금도 광주에서 10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시민생활환경회의’라는 시민단체를 그때 그곳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생활환경오염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던 일이다. 합성세제를 보이콧하면서 새로운 비누를 만들어 쓰도록 했던 이 비누운동은 당시로서는 유명한 사건이다.

또 있다.
나치스를 피해 망명한 마르쿠제,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학원대학인 뉴욕의 사회과학원대학에서 나에게 박사학위를 주기로 결정했으니 도미(渡美)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패스포트가 떨어지려면 안전기획부의 교육에 참가해야 한다. 참가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이 다 아다시피 순 진짜 개떡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라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박사학위며 뉴욕이며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뭐 그리 대수이고 뭐 그리 중요하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솟았다. 미국에 전화로 학위를 사양하겠다고 말하고 안기부 교육도 그만 집어치워버렸다.

나는 매일 무등산에 가 몇시간이고 걷다가 돌아오곤 했다. 나에게 그 무렵의 그 산책은 바로 행동이었다. 화염병이나 몰로토프 칵테일이 아니라 레인보우나 녹색이 바로 자기 사상의 색채인 자에겐 산책도 행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한 철학적, 과학적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확인해둬야 할 사건이 생겼다.

소위 무공해농산물, 유기농산물의 도시농촌간 직거래로 유명해진 ‘한살림’, 이른바 새생명운동은 내가 감옥에서 나온뒤 나와 동료들이 시작한 새로운 대중운동인, 두가지 생명운동의 한 축인 환경운동과 나란히 함께 시작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적인 민중, 시민운동의 남상이었다.

그런데 17여년전 원주에서 출발할 때부터 나는 이 생명운동이 반드시 문화운동, 정신운동과 두 바퀴의 수레로 구르지 않으면 곧 중산층 이기주의나 농촌상업의 일형태인 ‘잘먹고 잘살기’ 따위로 추락해버릴 것이므로 도농직거래와 함께 문화운동이 꼭 병행돼야 한다고 강력히, 강력히 주장했었다. 그러나 자금 및 인력 또는 모든 면에서 힘에 부치는 일이어서 차일피일 하다가 바로 이 무렵에 기적처럼 한 친구의 자산으로부터 자금원이 나타난 것이다.

아직 장선생님도 지주교님도 살아계실 때다. 서울시청 앞 대한일보 빌딩에 사무실을 얻어 신문방송 관계, 잡지 출간, 연설회 등 대중문화운동이 불티 일듯 시작되었다. ‘한살림’이란 잡지 첫호가 나왔고 ‘한살림 선언’이라는 유명한 마니페스토가 출현했다.

나의 위치는 연구위원장이었고 사무 총책임을 이제는 국제적인 예술가인 김민기 아우가 맡았다.

나는 목동에서 지하철로 시청앞까지 통근을 했다. 그리고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서울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주임인 이부영(李符永) 박사를 만나 진찰, 치유를 몇 년간 똑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받고 또 받았다. 자유연상, 꿈분석 등 안해본 게 없다. 어찌되었거나 나는 그 바람에 칼 융을 비롯한 정신의학 지식이 풍부한 새로운 타입의 지식인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환상 초기의 원주기독병원쪽 진단은 알콜중독에 의한 뇌손상이었으나 두 번의 자기공명촬영(MRI) 결과 전혀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고, 이부영 선생쪽 진단은 ‘일종의 예언자적인 종교적 환상’이었다.

한살림은 많은 운동가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자금원이 끊어지고 소비자 공동체의 여성 리더들로부터 문화운동 무용론이 극렬할 정도로 심해져서 참으로 허무하게도 어느날 중지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밖의 나의 일은 담배, 침묵, 독서, 산책,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탑’이었다. ‘탑’! 시인 횔덜린은 정신질환으로 9년간 밀폐된 탑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한다. 탑에서 몇 년이 걸렸는지 나는 지금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다행한 일은 그 기간동안 시쓰기를 잊지는 않았으니,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그리고 ‘화개’ 속의 대부분이 이 시절에 쓰여진 것들이다.

그렇다.

‘지옥’이니 ‘짐승의 시간’ 같은 동물적 표현보다는 ‘탑’이 훨씬 더 문화적이다.

그렇다.

그렇게 궁금스럽게 여기고 있는 그 몇 년간을 꼭 이름 붙이라 한다면 ‘탑’ 밖엔 없다. 최근의 시집 ‘화개’에도 나오는 ‘횔덜린’이란 시에 횔덜린 자신의 ‘탑’ 시절의 시가 두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 중에도 첫구절은 독일어의 강력한 악센트 때문에 더욱 지독하게 폭력적이어서 소름마저 끼친다.

'Ich bin nichts mehr!'

나의 ‘탑’은 두 구절뿐이다.

그밖에 더 말해달라고 해봐야 할 말이 없다. 저녁노을, 새벽 먼동, 공원의 꽃나무들, 아파트 숲 먼곳에서 움직이는 구름모양들, 햇빛. 그런 것들뿐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아마 그 이상은 듣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보거나 생각하거나 듣거나 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권태 그 자체이니까.

두 아이들과의 사이도 이미 표현한 바 있다. ‘소 닭보듯, 닭 소보듯.’ 그러나 그래도 ‘횔덜린’은 시인답게 ‘탑’ 속에서 희랍의 신(神)들을 만났다. 저 지독한 유물론자, 공산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의 경우 아내를 교살해 죽인 뒤 공민권을 박탈당한 그 10년동안의 ‘산송장’(Lebenstote) 시절은 사실에 있어서는 그 스스로에 의해 이름붙여진(철학이란 이런 것이다!) ‘환상이라는 이름의 사실’이었으니 ‘탑’ 같은 문화현상에는 아예 접근조차 못하는 냉냉한 사실들의 ‘지옥’인 것이다. 그 무렵의 굶주림은 순전히 장모님의 배려에만 의지해서 넘어섰다는 사실까지 함께 생각해보라.

내가 이 회고록에서 제시하는 환상들, 그림들, 묵시(黙示)들을 알튀세르의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횔덜린의 신성(神性)들로 인정할 때에만 ‘히페리온’이라는 저 심오함과 함께 ‘유명론적 유물론’이라는 유럽 사상사 최고의 그 치열함이 비로소 인류의 이름으로 시인될 것이다. 더욱이 고야와 고호를 심층적으로는 어찌 봐야 하는가?

더 이상은 말하지 말자.

니체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고 ‘탑’과 똑같은 요새 감옥에서 서서히 서서히 샅샅이 샅샅이 삶을 파괴당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까지 이야기가 지속된다는 것은 이 일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근원적 잔인성의 증명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탑’!

내 독일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도 ‘Turm’일 것이다. 그 ‘탑’에서 그때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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