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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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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87>

그물코

이무렵의 시들은 틈이 많고 엉성하다. 그러나 이 틈을 통해 나는 많은 이야기와 노래와 담론을 뭇생명들과 주고받았으니 나는 이것을 바로 '그물코'라 이름지어 이 이름으로 새로운 문화운동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에겐 친구가 없었다.

나는 친구를 혼신으로 불렀다.

〈겨울시편〉이다.

내 마음 깊기가
겨울바다 같아라

아파트 사이
아스팔트 위에
길게 끌린 내 그림자
하늘 닿아라

눈덮인 산속에 갇혀
잠이 든 나의 친구
설화 지는 소리에
내 꿈 꾸어라

내 몸 솔 같고
지금 여기 나
그래
무궁이어라.

무궁에, 내 속 아득한 곳 모두가 하나요, 하나의 새로운 모두가 비약을 준비하는 때, 그렇게 생각했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시심(詩心)만이 그 새로워진 무궁을 마련해 우주 벗들의 밥상에 내놓을 수 있다고.

나는 목동의 파리공원 그 나지막한 관목숲 곁에서 '필사적인 공경'을, '온몸을 바치는 공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화개(花開)', 즉 '새파란 별뜨듯! 붉은 꽃오리 살풋 열리듯!'은 회음혈에서부터 시작하는 주문수련, 시천주(侍天主) 수련 혹은 별수련의 화두였으니 그것이 나의 모심(侍)의 풍류선도였다. 공경의 수련이었다.

단순해질 대로 단순해진 공경이 한 편의 극도로 단순한 공경의 시, 즉 〈공경의 마니페스토〉를 낳았으니.

꽃 사이를
벌이 드나들고

아기들
공원에서 뛰놀 때

가슴 두근거린다
모든 것 공경스러워
눈 가늘어진다.

나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한톨 좁쌀처럼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가까운 벗들, 아우들도 모두 멀어졌고 신문, 잡지, 방송도 남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외로움 속에서 꽃과 벌, 공원 모래마당과 발벗은 아기의 분홍빛 살결이 보이고, 아아, 그런 것인가? 그렇게 내면이 해맑아졌으니 더욱 복잡하고 넓은 우정이 다시금 아니 생길 도리가 있겠는가?

강대인, 이창식, 주요섭, 윤형근, 그리고 독일에서 바로 내 꿈을 두 번씩이나 꾸었다는 문순홍('설화 지는 소리에 내 꿈 꾸어라'라고 노래한 때가 언제던가? 놀라운 일을 나는 이제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다) 아우들이 나와 함께 십수차례씩의 공부모임과 심도있는 검토를 거쳐 '생명민회', 즉 '생명가치를 위한 민초들의 모임'을 시작하고 우선 그 정치적 형식에서 지역 풀뿌리 민주주의운동에로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강대인, 이창식 아우 등이 주동이 되어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연대' 수수백 명의 연대 그물이 발족했고 나는 그 모든 형식을 화엄경(華嚴經)과 법망경(法網經)에 토대한 '그물코'운동으로 내면화시켰다.

'그물코'는 간행물 제목이기도 하다. 투철한 일꾼 주요섭이 《그물코》를 맡아 한참 경영하였으나 애당초 그리 영세하게, 조그맣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제대로 갖춘, 생명문화운동과 지역의 풀뿌리 정치 등을 연결시키고 동북아와 세계의 환경, 생활협동, 유기농 등 시민생명운동을 네트워킹하는 그야말로 '그물코'였고 그 자금을 쌍룡의 김석원(金錫元) 회장으로부터 희사받았다. 김회장께는 감사하면서 또한 미안하다. 편집진과 나의 불화로 일은 깨어져버렸으니 할 말은 많으나 침묵 속에 묻겠다.

그렇지만 《그물코》는 영세한 형태로나마 유지는 되고 있었고 생명민회는 해체와 카오스시대의 통일론인 '풀뿌리연방제통일론'을 내세우며 경기도 부천과 전북 부안에 근거지를 만들고자 몇년 간을 노력했다.

내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선거유세연설까지 해보았으니 부천시장에 출마한 이창식 아우를 위해서였다.

내가 그때, '그물코'의 큰 구상이 깨어진 뒤 힘을 몰아넣었던 것은 부안 변산반도에 전남·전북·충남·경기를 잇는 풀뿌리생명운동의 한 근거지를 장만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부안에 자주 갔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찌하든 인근의 타지역과 연대시키려고 노력했다.

지역통화나 비판적 지역주의 등도 검토여과했으며 특히 민중변혁사의 온상인 그곳에 강력한 새로운 지역 풀뿌리운동 기지를 구축하려 했다. 강대인, 문순홍, 이창식, 주요섭과 현지의 이강산, 김운주, 김완술, 고영조 아우들이 힘을 많이 썼다. 전남에서도 김성종, 천용식, 정지산 아우들이 참가했으며 내가 좀 뜸한 사이에도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이것은 작지만 큰일이고 오래됐지만 새 길이다.

그러나 봉건제(封建制)가 아닌 군현제(郡縣制) 국가였던 우리 사회에서의 수도권 중심주의, 즉 '메트로폴리즘'은 사실상 완강하다. 인간에게 자기중심주의, 집단이기주의가 강한 것 못지 않게 서울은 전인구의 반을 독점하고 온갖 인물과 시설과 자금, 기구를 독식하고 있다. 이 중심으로부터의 이탈, 틈, 텅빈 무(無)의 사상은 이무렵 나의 모든 사유를 점령하고 있었으니 목동에서 일산(一山)으로 이사할 무렵의 시집 《중심의 괴로움》은 중심 중심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인 '탈중심의 어려움'을 가리키는 해체의 사유인 것이다.

어떤 문학평론가가 이 제목을 두고 "아직도 제가 중심인 줄 아는 모양이지……!" 했다는데 쓴웃음을 넘어 눈물이 난다. 한번 읽어보자.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비움, 무(無). 이것은 어느 사이엔가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움직이는 근원이요 배경이 되고 있었다.
비움, 무, 없음.
그것은 빛으로 치면 흰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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