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쉰에 접어들고 있었다. 목동에서다.
집도 삶도 어둑어둑했다. 그늘이었으니 흰 빛과 분열된, 아니 애당초 흰 빛과는 거리가 먼, 나의 저 흰 우주의 길과는 도무지 연속되지 않는 어둑어둑한 삶의 그늘이었으니 바로 이 '그늘'을 담은 것이 나의 목동시절의 시 〈쉰〉이다.
나이 탓인가
눈 침침하다
눈은 넋그물
넋 컴컴하다
새벽마저 저물녘
어둑한 방안 늘 시장하고
기다리는 가위소리 더디고
바퀴가 곁에 와
잠잠하다
밖에
서리 내리나
실 끊는 이끝 시리다
단추 없는 작년 저고리
아직 남은 온기 밟고
밖에
눈 밝은 아내
돌아온다
가위소린가.
누군가 이 시 〈쉰〉을 두고 나의 지천명(知天命)의 시라고 했다. 가위소리를 기다리는 지천명도 있는가?
나는 실패한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 '쉰'에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것이 실패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아니라 해도 가위소리는 무언가를 끊는 소리다. 끊음을 기다림은 삶이 권태롭다는 뜻이고 그늘은 우선 실패에까지 이르른 신산고초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컴컴한 넋그물의 시학이매 일단은 '아우라'나 '무늬'와는 거리가 있다.
누군가 이 시 〈쉰〉을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그늘에만은 빛이 들지 않을 것인가? 영원히 어둑한 그늘로 일관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시간이란 반드시 시종(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라는 점이다. 끝이 있을 것이다. 그러매 새로운 시작도 있을 것이다.
나는 목동시절 박재일 형의 '한살림'이 유기농생산소비운동 이외에 또하나의 필수적 수레바퀴인 문화운동을 시작한 점에서 내 삶의 종시를 보려 했다. 그늘로부터 새 빛이 돋으리라 기대했다.
이것은 그 이전 한살림의 출발시기부터 내가 강조해온 바로서 문화운동이라는 또하나의 수레바퀴가 없는 유기농생산소비공동체운동 외쪽만으로는 한살림은 필연적으로 중산층적인 소비이기주의와 기업농적인 상업생산으로 기울고 말 것이라는 주장에 터를 둔 것이다.
한살림은 그동안 박재일형의 노고의 결과로 상당히 성숙하였으나 그 예견된 바 한계가 보임으로써 문화운동의 배합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에 문화운동을 위한 최소한의 자금을 내놓겠다는 참으로 기쁜 제안이 있어 시청앞 대한일보 빌딩에 방을 빌리고 최혜성 형과 김민기, 윤형근 아우가 주축이 되고 내가 연구위원장이 되어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환경운동과 유기농운동을 포함한 생명운동 전반에서 가장 획기적인 명문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혜성 형의 '한살림선언'이 그때 발표되고 부정기간행물 《한살림》이 그무렵 발간되었다.
우리는 정기적인 한살림 강연회나 토론회를 꾸려나갔으며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한살림사상과 한살림문화운동의 향방을 선전하였다.
이미 원주사회개발운동의 연한을 마친 영주 형님이 새로이 원장으로 취임한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가끔 보고회를 가질 때는 푸른 이파리 붉은 꽃으로 뒤덮인 연수원 정원의 향기 그윽한 등나무 넝쿨 밑에서 참으로 순결하고 진정한 희망으로 고양된 기쁨들을 나누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늘 장선생님께서 중요한 지침을 주셨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때가 일렀던가?
돈을 내겠다던 사람이 떨어져 나가고 거의 동시에 소비자공동체의 골간인 여성지도자들이 왈, 왈, 왈,
"소비자운동만도 벅찬데 무슨 놈의 문화운동이냐? 옥상옥(屋上屋)이 아니냐?"
마구 떠들어댔다.
박재일형이 후퇴했다.
나는 한살림에서 손을 뗐다.
재작년과 작년부터 한살림에서 또다시 문화운동 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것을 생산소비운동 외에 또하나의 큰 수레바퀴로 여기지 않고 무슨 고급스럽고 아담한 주부 교양시간 정도로 여기고 있으니 도저히 난망(難望)이다.
나는 또다시 그늘진 소라껍데기 속에 웅크려 앉아 환상과 마주했다.
'쉰'의 침침함과 넋의 컴컴함이 계속되었다. 빛이라곤 단 한줄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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