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 갑갑함은 마치 도시에 살다 시골에 돌아간 젊은이나 시골에 살다가 도시의 아파트에 갇힌 늙은이의 그것 같았다. 원주로 전학했던 원보를 위해 해남이 아닌 광주를 택했으니 그무렵 광주고속에 근무하던 조성삼(曹省三) 선생의 배려이기도 했다. 광주의 조선생 화정동집 가까이 한 아파트에 세들었다.
원보와 세희는 적응을 잘 못하고 있었다. 광주 애들은 해남과 달리 텃새가 심했던 것이다. 그 여진과 상처는 지금까지도 남아 나의 오류와 내 삶의 하자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사진>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택시 타고 무등산 입구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 김덕령 사당을 돌아 다시 시내로 나오는 산책 뿐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광주에 있을 때 뉴욕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근거지인 사회과학대학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할 테니 도미(渡美)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여권을 신청하고 비자를 내기 위해 정보부에서 행하는 일정한 과정에 들어가 연수받았던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고 수상하고 괴상한 짓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통일정책이 그밖에 안 되니 별 오두깨비
같은 짓을 다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한참 다니다 도대체 박사학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대답은,
'웃기지 좀 말라'였다.
그래 그날로 그만두고 미국에는 건강 때문에 못 간다고, 학위는 안 받아도 좋다고 기별했다. 허나 그것은, 이제와 생각하니, 단견이었다. 학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근거지로서의 대학과의 인연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또한번 깊이 생각해보니 그 밝은 무등산마저 어둑어둑했던 내 정신의 어둠 속에서 프랑크푸르트는 과연 무엇이고 하이델베르크는 또 무엇이었으랴!
그 직후 우리는 단안을 내려 아이들 장래와 나의 병치료, 그리고 원주연세대에서 강의하게 된 아내 때문에도 서울로 옮길 것을 결정했으니 내가 목동에 자리잡게 된 내력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