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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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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7>

재발

"마시지 말라니깐
마시지 말라니깐
또 마셨구나 또 마셨구나
이젠 혼이 나야 한다
이젠 혼이 나야 한다."

허공이 쩌렁쩌렁 울리며 하늘이 흔들흔들 하며 환청이 다시 시작되었다.

문 바깥에 해월선생이 와계셨다.

무섭게 생긴 선생이 웬 여자 둘을 거느리고 마루 앞에 서 계셨다.

나지막한 토담 위에 걸터앉아 내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고 내 손짓 발짓만 크게 크게 확대되어 내게 보였고, 두 여자는 내 양 옆구리에 찰싹 붙어서 아랫도리를 할퀴기 시작했다. 고양이 발톱이었다.

<사진>

갑자기 벽 위의 해월 사진이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놈아 너는 이제 죽었다―
이놈아 너는 이제 죽었다―."

문지방으로 번갯불이 확 들어와 지그재그를 긋더니 이불 얹힌 낡은 궤짝 안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동시에 해월 선생은 내 뇌파에다 전파를 맞추어 뇌파고문을 시작한다. 한번 번쩍할 때마다 온몸이 뻣뻣해지며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악을 악을 쓰면서 궤짝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 바둥대었다. 몸은 안 들어가고 머리만 들어가서 안에 똬리를 틀고 도사려서 번갯불같이 번쩍이는 웬 놋쇠뱀에 감겨 정신이 깨어났다 까무라쳤다를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하였다.

꼭대기가 깎여나간 말뫼 가는 언덕 위에 한 검은 집이 있고 나는 그 집 안에 묶여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웬 중이 내 곁에 우뚝 서서 말한다.

"당신이 왜 이 모냥이냐? 팔식이 허물어졌다. 당신 아내는 고결한 귀부인이고 당신 아이들은 정신세계의 장수들이다. 우리가 맡아 살릴 터이니 안심하고 떠나가시오."

이어서 내몸을 토막토막 내 죽였는데 그날 밤 하늘에 큰 구름이 일어나며 수운선생이 직접 내려오셨다. 내 몸을 다시 붙이고 손으로 쓸어주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너는 살았다. 그러나 넌 다시 태어나야겠다."

한마디를 남기고 하늘로 다시 돌아가셨다.

곁에 서서 울며울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던 해월 선생 왈,

"이놈아! 너 이제 이도 저도 다 버리고 그냥저냥 살아라! 알았니, 이놈아! 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병이 낫는 날이네 생일날이다. 큰 지옥을 통과해야만 너는 다시 태어난다!!"

내가 정신을 잠깐이라도 조금치라도 수습한 것은 원주 가는 택시 안에서였다. 해월 선생과 이야기하고 때로는 농담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원주 가던 길에서였다.

원주 시내에 다 가서 나는 소변보러 간다고 택시에서 잠깐 내려 냅다 튀었다. 미친 듯이 뛰어 달리다가 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청주로 간 것이다.

이미 원주길에서 해월 선생 왈,
"청주에서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네가 원주에 가봤자 망신이다. 네 아내만 고생시킬 뿐이다. 청주에 이동순 시인이 너를 기다리고 있고 손가락을 잘라서 네게 일신을 의지하려 했던 도둑놈 '오소작(吳少作)'이가 문둥이 왕초가 돼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청주 문둥이굴에 들어가 나머지 일생을 보내거라. 너 이제부터 온몸에 부스럼이 나기 시작해서 청주에 도착할 때쯤이면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이 뭉턱뭉턱 잘려 나갈 것이다.

어디 웃어봐! 문둥이처럼 헤헤 웃어봐! 어서!"

나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헤헤헤'하고 거렁뱅이 문둥이처럼 비굴하게 자꾸 웃었다.

"그래 임마! 똑 문둥이다! 그렇게 살어! 오소작이가 너를 돌보고, 이동순이가 가끔 와서 들여다볼 거다. 그럼 됐지, 임마! 인생이 별거더냐!"

나는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문둥이로 살아갈 새 인생에 대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차가 청주에 도착했다.

차가 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택시값도 지불 못하는, 미친놈처럼 헤헤거리다 울곤 하는 나를 경찰서로 인도한 것은 운전기사였다.

나는 경찰관에게 자꾸만 이동순 시인과 오소작이 있는 데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몇시간을 기다렸을까?

기다리면 이동순이가 온다고 했으니 동순 아우와 함께 오소작의 소굴을 알아내려고 마음먹고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누군가 깨워 일어나니 곁에 원주 천하태평집 주인 선종원 형이 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강제로 원주기독병원 정신신경과 병실에 입원해 주치의 신정호 선생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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