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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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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76>

제주

그 이튿날 삭발에 캐쥬얼 차림으로 자그마한 단도를 한 자루 품에 품고 김광식 아우와 천용식 아우만 데리고 완도에서 페리를 타고 제주로 건너갔다.

〈검은 산 하얀 방〉의 원고를 왜관에 있는 분도출판사에 넘겼으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검은 산 하얀 방〉 자신이 제주항에 내려 스스로 5·16도로를 통해 서귀포로 가고 있었다.

제주 친구들에게 전복을, 산덩이만한 전복을 대접받았다. 그러나 나는 먹지 못했다. 다만 환식(幻食)만, 허공에 대롱거리는 밥그릇처럼 슬픈 그림 같은 전복만 전복만 꿈속에서 아귀 아귀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끝없는 술.

소주, 소주, 소주……

밤낮없는 안팎없는 그저 소주뿐.

안주는 돌소금 그저 그뿐.

한밤중에 용식이가 광식이를 팼다. 광식이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꿈에 노래를 노래를 불렀다.

……저 바다
검은 바다 유혹의 바다
은색의 구름은 눈부시어라
생명이여 생명이여
물결에 달빛 쏟아지네.

그러나 나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잠자고 있을 뿐이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밖에 나가 절벽 위를 거닐었다. 마지막 삼별초(三別抄)들이 범섬에서 나를 외쳐 불렀다. 몽고군의 창 끝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외침을 내 가슴에 문신처럼 깊이깊이 아로새겼다.

생명이여 생명이여
물결에 달빛 쏟아지네.

눈을 떴을 때는 저녁 해거름이었고 곁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죽어 있었고 누군가 내 송장을 제 무릎 위에 얹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검은 바다 유혹의 바다
은색의 구름은 눈부시어라.

나는 단도의 칼날 위에 내 손가락을 비비며 비비며 피를 흘리며 피를 흘리며 또 잠들었다. 깊이깊이 잠들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섬을 가로질러 황파두리로 가서 작은 돌들을 돌들 위에 던졌다.

'딱― 딱― 딱―' 소리를 내며 플라스틱 샌들을 복도 위에 딱딱거리며 누군가 떠나고 있었다. 그 곁에서 한 소녀가 노래를 불렀다.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비행기에서 용식의 무릎 위에 죽어서, 죽은 채로 광주공항을 거쳐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동집 어두운 내 서재에 비틀거리며 들어가 이번엔 완전히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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