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서쪽 벽 위에 동학과 민족운동의 지도자들 모습이 계속 보이더니 동학 토벌과 반민족행위자들의 흉한 모습들이 또한 계속 보였다. 조병갑, 홍계훈, 이용태,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은 알아보겠으나 그밖엔 누구인지 모를 수십 명의 모습들이 꼭 그 무렵의 흑백사진들처럼 지나간다.
또 지나간다.
이번엔 동학혁명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후 외국으로 망명하는 인사들의 얼굴이었고 갈매기가 날고 기적을 울리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기선들과 돛배들, 엿장수와 과일장수, 짐꾼들이 북적대는 부산항, 인천항, 원산항 등이 지나간다.
감격적인 노랫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고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길거리에 민족통일의 퍼레이드가 지나가고 삐라들이 허공에 가득 가득히 살포되어 날고 날아 우리집 마당에까지 날아든다. 이윽고 어떤 반국가 지하조직의 계보가 발표되고 눈부신 전등 아래서 취조받는 피투성이 얼굴들과 물고문당하는 벌거벗은 여성들이 보인다.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세칭 김지하사건의 전모를 발표한다. 또 거칠고 우악스럽게 생긴 검은 옷의 수도자들이 내몸을 토막토막 내고 고문한다. 나는 엎드려서 〈민족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지붕 바로 아래에서 수도자들이 자기네끼리 뭐라고 내내 두런거린다 두런거린다. 한 젊은 여자가 해남읍내 중심가에서부터 내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우리집으로 다가와 내방 문앞의 화단 커다란 백일홍나무 밑에 누워 시뻘건 심장을 꺼내놓고 나더러 먹으라고 눈웃음친다. 자꾸만 나를 끌고 거리로 나가려 해서 내가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아내는 나를 필사적으로 막는다. 씨름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두 아이가 엉엉 소리내어운다. 환상중에도 '아아 지옥이로구나!'라고 생각한다.
알 수 없다.
별의별 이상한 짓거리를 다 하는가 하면 수많은 환영과 이미지들이 겹치며 지나가고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일주일 만에야 정적이 찾아왔다. 그동안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여 눈은 퀭하고 볼은 움푹 패이고 이마엔 주름살이 쭈글쭈글, 완전히 폐인이었다.
나는 무슨 까닭이었는지, 술을 끊겠다는 결심에서였는지 이발소에 가지도 않고 가위로 싹둑싹둑 삭발을 했고 그무렵 사월초파일에는 아이들과 아우들을 데리고 대흥사에 가서 식구들 이름을 쓴 연등을 단 뒤 아우들과 또 술을 마셨다. 막걸리가 그렇게 맛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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