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상의 착오로 일부(10회분)가 누락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누락된 부분을 연재해 순서를 바로 잡고 지난 4월 28일 게재됐던 274회 "척분(滌焚)"을 284회로 다시 게재하겠습니다. 필자께 죄송하고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편집자.
누구던가 서울에서 손님이 와, 누구던가 서울에서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 와 술을 많이 많이 마시고 그 뒤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시고 누워 있었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데 이불 위로 같기도 하고 옷 위로 같기도 하고 맨살 위로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같은 것이 몇차례 핥키고 지나간다. 환촉(幻觸)이겠는데 환촉인 줄 모르고 그저 이상하기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때.
서쪽으로 난 내 서재의 창문에 노을이 비낄 때 어둑한 방안, 창문밑 책상 위 벽에 걸어둔 해월 최시형 선생의 처형 직전의 사진, 한 러시아 신문기자가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자리 바로 뒤꼍 좌포청(左捕廳)에서 우연히 찍은 그 사진 속의 해월 최시형 선생의 얼굴과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입술에 갖다대고
"쉬잇― 영일아! 일어나라, 일어나!"
일어나 앉았다.
"너는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매일 매일 뽀끔뽀끔 푸우 푸우 하고, 꿀꺽 꿀꺽 꿀꺽하고, 쿨룩 쿨룩 쿨룩하는거냐? 너는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나 해월이다 해월!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마라! 내가 너한테 간다고 했더니 수운 선생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 수운 선생이 너한테 전해 달라고 이 노래를 부르시더라!"
선생이 시조를 읊으시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고조되면서 선생의 몸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듯 한참을 그러더니
"영일아! 네가 좋아하는 거창의 한 후배가 오고 있다. 큰길에서 지금 꺾어져 네집 대문으로 걸어온다. 어서 나가봐, 어서!"
일어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키가 훤칠한 한 청년이 막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 청년은 내가 아직 원주에 있을 때 성당으로 찾아온 거창고등학교 2학년 학생, 그였다. 선생님들이 내게 가보라고 해서 왔다던 그 고등학생은 참 총명해서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듣는 눈치였는데 아아, 지금 그가 어른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선생님, 저 알아보시겠어요? 저 거창고 다니던 학생입니다. 지금은 중앙대학을 다닙니다. 학생운동하는 제 친구들이 하도 같잖은 짓을 해서 선생님께 몇 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폭력을 앞세운 운동, 조직을 앞세운 운동, 세대론을 앞세운 운동은 옳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어찌 생각하느냐는 거였다. 무어라 대답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몸이 좀 안 좋다고 하자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나는 다시 내방으로 돌아왔다.
환영은 계속되었다.
해월 선생을 묶은 오랏줄이 클로스업 되며 재3세계와 한민족을 가운데 놓고 각축하는 네 개의 제국주의 세력의 상징적 형상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검은 양복을 입은 미국 코쟁이들, 견장과 모자를 쓴 군복의 러시아 코쟁이들, 일본도(日本刀)를 차고 머리를 깎은 일본제국주의자들, 변발을 하고 비단옷을 입은 중국제국주의자들.
오랏줄에 꽁꽁 묶인 해월 선생의 눈앞 허공에 밥그릇 하나가 매달려 대롱거리고 선생은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쓰나 밥그릇은 자꾸만 옮겨가면서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가득찬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영일아! 영일아!"
해월 선생의 환영이 나를 불렀다.
"너 배고프지? 밥 줄까? 배고프지?"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영일아! 너 좋아하는 후배가 또 왔다. 어서 가봐라! 안방에 있다."
문을 열고 나가서 안방에 갔더니 거기 해남종합병원의 의사인 동국(東퐹) 아우가 와서 아내와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아내가 병원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동국의 눈이 번들거리며 이상했다.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환영은 계속되었다.
한국의 근대사 같았다.
광산에 끌려가는 사람들, 처형당하는 사람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도시의 거리를 구걸하며 떠도는 사람들!
몽양, 백범 등의 연설모습이 보이고 이어서 김일성의 군중연설 모습, 또 김정일의 군중연설 모습까지 보였다. 그리고는 내 뒤편에 있는 마루방 창호지문이 화안하게 밝아지며 흰 고양이 서너 마리가 내 몸을 발톱으로 할퀴기 시작한다.
한참을 그러는 중에 바깥은 캄캄해졌고 아내가 가끔씩 살금살금 걸어와 문밖에서 내 동정을 살피는 것이 감촉되더니 이윽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잠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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