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284회 '척분'부터 287회까지는 지난 4월 28일부터 3일간 274회~276회로 게재된 것이나, 당시 편집상의 착오로 누락된 10회분을 추가한 후 회차 번호를 바꿔 다시 게재합니다. 288회는 누락과 관련한 저자의 글이며 289회부터는 새로운 글이 이어집니다.
***척분(滌焚)**
동아일보에 나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가 연재중에 있었다.
그 내용은 이 회고록의 시작에서 6·25전쟁 직전까지의 부분에 실려 있다. 연재하던 그무렵 명지대 강경대군 치사사건에 뒤이어 학생들의 분신이 거듭되고 있었다. 정국은 시끄러웠고 학생들은 연일 시위와 함께 의사(義士), 열사(烈士) 추모식을 거행했다. 자꾸 죽었다. 자꾸만 제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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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에도 흰 새하얀 불길이 활활활 타는 듯했고 매우 뜨겁고 몹시 괴로웠다. 생명에 대해 입을 다물든가 아니면 분신을 만류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
운동의 선배로서, 한 사람의 생명론자요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 말을!
그러나 세상의 지식인들, 내노라하는 자칭 선비들 모두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권력 아니면, 학생들에게 혼이 날까 봐 아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무렵 이부영 선생을 뵈었다.
꿈분석이 끝난 후 선생이 내게 물었다.
"요즘 시국을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말려야 할 텐데……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하나 물어봅시다. 학생들을 사랑하세요?"
"네. 사랑합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올시다. 민족의 책임 역량은 일정한 것이어서 지금 분신하거나 또는 발언하고 있는 학생들이 이 나라의 중요한 역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운동의 선배로서도 말을 해야만 하는데 끄트머리가 안 잡힙니다."
"말리세요. 말려야 합니다."
"그래야지요."
"자살하는 사람을 말리는 데는 말을 부드럽게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러면 더 하지요. 야멸찰 정도로 냉정하게 꾸짖고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살의 명분을 못 찾게 됩니다. 명분이 서는 한은 어떻게든 죽으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 말뜻 하나에 이미 뼈대가 섰다. 동아일보가 좋았다.
그러나 동아일보에는 이미 나의 회고록이 한 면 전체를 차지하며 주말마다 연재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기고문까지 싣게 되면 나만 아니라 편집국장까지 욕을 먹는다. 조선일보가 좋다. 조선일보에 싣자. 그렇게 결정되었다.
조선일보에 기별하자 대환영이었다.
조선일보는 오고 있고 나는 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미 생각해오고 있던 것이라 단필에 써내렸다. 나의 직심(直心)이었다.
직심!
그렇다. 머뭇거리지 않고 썼으니!
내용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
신문에 인쇄되어 나왔을 때 나는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내 글보다 신문의 논설과 기사가 더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될 것인가?
서강대의 박홍 총장이 분신을 공격하고 나섰다. 세상이 들끓기 시작하고 학생들 사이엔 도리어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 것인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나의 제명을 결정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저희들이 무슨 쏘비에트 작가동맹이라고…….
나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가로막고 나섰다. 아내는 걸려오는 전화마다 매섭게 쏘아붙였다. 욕하는 전화도 통곡하는 전화도 협박하는 전화도 있었다.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일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강릉에 사는 나의 벗, 권혁구 형에게 가서 해변의 한 여관에 묵으며 한밤중 새카만, 그러나 흰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새카만 밤물결을 바라다보았다.
검은 물결들 위의 그 자그마한 흰 물보라들!
그렇다.
강경대군 사건의 책임추궁과 함께 무엇보다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예절을 찾아 챙기지 못했구나!
그날밤 내내 핏발선 눈으로 불에 타는 학생들의 몸둥이가 딩굴며 외치며 삼도천(三途川)을 채 못 건너고 강 앞에서 후회하며 후회하며 고통에 못 이겨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모습들을 환상으로 보았다. 참혹했다.
기도하고 또 좌선했다.
새벽녘. 아직 먼동이 트기 직전 내 마음 저 안쪽에서 조시(吊詩)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간결하고 평이했다.
스물이면
혹
나 또한 잘못 갔으리
가 뉘우쳤으리
품안에 와 있으라
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이슬 받으라
수이
삼도천 건너라.
'척분, 물로 불탄 곳을 씻음(滌焚)'이란 제목을 붙였다. 새벽부터 정부에 대한 강경한 성토문을 쓰고 그 맨 마지막에 이 한편 시로써 죽은 이들을 위로했다. 나의 가까운 원주 선배 한 분과 아우 한 사람이 그 원고를 가지고 상경하여 조선일보에 전했고 글은 바로 그 이튿날 게재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학생들의 분신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웬 중국집 배달원 한 사람과 파출부 다니는 한 아주머니가 염세자살한 사건만이 있었을 뿐이다.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비극이다. 다만 나는, 내 입장에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했고, 매섭게 꾸짖어야 자살을 단념한다는 권위있는 정신과학자의 충고를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며, 대중지 동아일보가 불가능해서 또하나의 대중지 조선일보에 게재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뒤 10년이 지나도록 나의 그때 조선일보 기고문에 대한 젊은이들의 비난은 그치질 않았고 지금까지도 사실상은 계속되고 있다. 두 가지 일이 생각난다.
한번은 '문화개혁시민연대' 그룹들이 나를 찾았다. 내용인즉슨
"김지하 선생님이 현대한국의 민중적 문화운동의 법통인 것을 누구나 부정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시대에 맞는 시민문화운동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법통이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법통을 따르기 위해선 선생님의 그 조선일보 기고문에 관련된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우선 어느 잡지에서든 운만 떼어주십시오. 결말은 우리가 짓겠습니다."
그래 그후 《말》이란 잡지와의 회견 과정에서 적절한 해명을 하여 그야말로 운을 떼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결말은 없었다. 또 작년이던가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실천문학에서 동일한 요청이 있어 민족문학작가회의와의 담화에서, 그리고 실천문학 김영현 사장과의 대담에서 또 한번 적절한 해명을 하여 운을 떼었다. 그러나 결말은 한겨레신문의 홈페이지에 거의 한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의 그 말이 그 말 같은 상투형의 지리하고 지리한 비난과 공격뿐이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두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있다.
먼저번 '문화개혁시민연대' 그룹과의 회식에서 한 젊은이가 계속 소주를 마셔대다가 나중엔 흐느껴 울며 한 소리다.
"그때 그 선배가 불탈 때 나는 몇백미터 거리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때는 이를 악물고 우리의 명분을 세웠지요. 목숨을 버리고라도 혁명을 성공시키겠노라고. 다른 기회에 또 필요하다면 나도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그런데 한 5, 6년이 지나서 어느날 대낮에 큰 길을 가는데 앞에 그 선배가 우뚝 서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술취할 때도 나타나고 꿈에도 보이고, 자꾸만 나타나서 내가 죽인 거라고, 내가 죽인 거라고 생각하게 돼요. 자꾸만……."
사실은 이 고백을 듣고 나서 나도 《말》지와의 회견 때 결단을 내려 해명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죽인 거라고……."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괴로울 것이다.
안다.
그러나 이젠 그만 잊고 절이든 성당이든 아니면 새벽녘 자기 방에서라도 명복을 빌어줘야 할 것 아닌가!
분신이 있던 그 다음 다음 해 내게 온 편지가 한 장 있었다. 분신이 있던 그 해 고려대 사회학과 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한 사회주의자의 편지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소련의 쿠데타 실패에 뒤이어 옐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동유럽의 연쇄적인 공산정부 붕괴가 있었습니다. 저는 세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고향 청송에 내려와 가톨릭에 입교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합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 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젊은이들의 아픈 마음속 기억 위에 평화가 깃들여야 한다.
이제 그만 그 일을 잊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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