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서 바다쪽으로 조금 나가면 강진쪽과 땅끝쪽 길이 갈라지는 곳 부근에 백포마을, 또는 백방포 마을과 함께 그 뒷산인 백방산이 우뚝 서 있다. 본디 섬지방과 제주, 그리고 중국으로 가고 중국에서 오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으며 섬으로 귀양길 떠난 인사의 가족이 귀양 풀리기를 기다리며 머물던 집들, 장사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는 지어미들이 묵었던 집들, 여각들, 객주집들이 즐비한 포구였다. 그리고 뒷산 백방산은 머언 섬이나 중국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기다려 먼 눈을 주던 아낙들이 서 있던 백방산 봉우리와, 지아비의 귀양풀릴 날만 기다리다 도리어 죽음의 소식을 듣고 절망한 아낙들이 몸을 던졌다는 '나가미(落岩)'가 있는 산이다.
아우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던 내 가슴에 왠지모를 깊은 한, 풀 길 없는 슬픈 정한(情恨)이 사무쳐오던 일을 도무지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일제 때에 간척을 해서 포구는 없어진 지 오래요 논만이 무연한 벌판에 백방산만 우뚝 솟았을 뿐 마을도 적막한데 어디서 그렇게 짙고 뿌리깊은 정한이 우러나와 내 가슴에 깊이깊이 저며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를 묻고 있는 내 눈을 의식한 동섭 아우가 다만 한마디,
"쩌그 저 나가미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들이 솔찮이 많은갑디다."
아하! 한(恨)이로구나!
한이 서렸구나!
두타산 무릉계의 저 시커먼 원한의 그늘과는 또다른 새하얀 고독과 인생유전의 슬픔이 내 가슴에 기이한, 기이한 눈부심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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