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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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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6>

문경새재

문경새재 바로 밑 고사리골에는 이대 김옥길(金玉吉) 총장의 별장이 있었다.

술과 내적 갈등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의 건강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김총장께서 나를 고사리로 초대했다. 참으로 편안한 땅, 즉 '노안지(老安地)'였으니 총장님께는 더없는 쉼터였다.

나는 그 이전부터 총장님을 '누님 누님'하며 따랐는데 내가 고사리골에 도착한 그날 마당에서의 저녁식사 직후 "술을 안 끊으면 나 누님 안 할 거야!"

술을 끊으라는 엄명이 내렸다. 술을 끊고 나를 위해 비워둔 한 조용한 방에서 밤낮 그저 쉬라는 거였다. 처음엔 그렇게 했다. 그러나 며칠 뒤부터는 살살 동네로 내려가 소주를 사다가 혼자 몰래 마시곤 했다. 알콜중독은 하나의 병이다. 큰 전환점이 없는 한 그것을 끊기란 죽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총장님이 드디어 그 원인을 발견했다.

하루는 저녁식사후 마당을 거닐다가 마당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분수를 가르키며

"김시인! 내가 저 분수를 보며 매일 뭐라고 기도하는지 아나?"

"뭐라고 하십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하"

"그걸 한문으로는 뭐라고 하지?"

"지족(知足)입니다."

"그래 지족! 김시인한테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야!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요 불굴의 행동인이요 최대의 사상
가로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

폭탄은 그 다음에 터졌다.

"도대체 언제 우리 영주 행복하게 해줄 거야?"

"예?"

"분가(分家) 말이야. 지금 영주한테 필요한 것은 분가야! 머리털 빠지는 거 그것 말이지. 자기 집, 자기 살림을 살면 머리털 다시 돋아! 그래 언제 단행할 거야?"

총장님은 매서웠다.

마구 몰아세웠다.

사실은 모든 문제가 거기에 달려 있었다.

"네 네!"

"네 네가 언제야. 오늘? 내일? 급해, 이 사람아! 잘못하면 영주 죽어! 약 먹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날 밤 꿈인지 환상인지, 반은 꿈이고 반은 환상인지, 웬 애꾸눈의 난쟁이 형제가 새재 꼭대기에서 산적질을 하다가 내려와 위아래에서 둘이 나를 서로 붙들고 잡아당기며 고문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아악!"

외치며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생각했다. 가자! 나는 바삐 짐을 정리하고 총장님께 편지 한 장을 써놓고는 부우연 새벽길을 터덜터덜 수안보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떠나는 거였다.

탈원주(脫原州)다.

나는 전부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평생의 소망이었고 이제는 낙향하여 생명과 영성과 지역공동체운동을 새로이 시작하자는 높은 뜻이 있었다. 그러나 목포는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그곳엔 옛 시절의 형해만이 남아 있을 뿐, 새 기운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이 두 번이나 해남에 다녀왔다. 그때는 아직 '소도시 가꾸기' 전이라서였는지 길가 토담 너머로 청청한 감나무 가지가 뻗쳐 나와 주황색의 익은 감을 길에서도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었다. 산물이 풍부하고 사람들이 멋을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 6·25전에 두 번 간 적이 있던 해남, 나는 그 해남으로 낙향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새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버스로 서울로 간 뒤, 아무에게도 들르지 않고 막바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터미널에 도착, 그곳에서 또한 막바로 해남행 버스를 탔다.

나는 그 길로 원주를 떠난 것이다. 해남종합병원의 김동섭(金東燮) 아우에게 연락하여 조그마한, 그러나 깔끔한 여관에 들어갔다.

동섭 아우에게 해남으로 낙향할 뜻을 비치고 집 얻을 것을 부탁한 뒤 바로 원주로 전화하여 아내에게 이삿짐을 챙겨 즉시 내려오라고 일렀다. 머뭇거리면 방해받을 것이니 앞뒤 돌아보지 말고 즉각 오라고 재삼 제사 당부하였다.

여관에서의 나날들! 꿈결같은 나날들!

그러나 술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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