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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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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5>

탈원주(脫原州)

원주 사회개발운동의 독일 미세레올 자금을 왜 평신도가 관리하느냐를 가지고 교구신부들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신부들은 자기들끼리의 모임에서 이 문제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지주교님이 흔들리자 영주 형님과 장선생님은 참다 참다가 드디어 '로만칼라 바리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주교구에서는 평신도지도자들과 신부들이 내적으로 서로 혐오감과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5공당국에 대해 장선생님이 유화책을 표방함에 따라 원주의 선생님 추종자들이 제1군의 장교단이나 정보부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함께 천렵을 다니는 일이 잦아져 신부들은 바로 이것을 좋은 공격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내홍은 심각했다.

주교님은 나에게 수습을 부탁했다.

그러나 신부들은 오만했고 영주 형님과 사회개발은 이미 프로그램대로 움직인 지가 오래였다. 거기에 장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입을 열 때마다 바리새 성직자를 강타했다. 종교개혁의 가능성까지도 엿보였다.

갈등은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었다.

내가 몇번을 중간에 서서 화해를 시도했으나 신부들의 오만과 장선생님의 분노 때문에 그때마다 좌절되었다. 나는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무렵 내 사상은 가톨릭의 서학(西學)에서 떠나 동학(東學)과 떼이야리즘, 그레고리 베이트슨 등에로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엑소더스' 즉 '탈원주(脫原州)'라는 말은 그무렵에 나와 박재일 형 등의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장선생님의 최해월 사상에 대한 심취나 생명사상에 대한 몰두도 깊어졌다.

장선생님은 최보따리(최해월 선생이 항상 봇짐메고 도망만 다니므로 그런 별명이 붙었다)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원성군 호저면에 비석을 세우고 박재일 형 중심의 생명운동 그룹 '한살림' 앞에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등의 주제로 강연한 것이 그무렵이다.

선생님은 우리의 '탈원주' 논의를 묵인했다. 원주는 이제 조용한 생명운동의 도시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회개발자금의 연한도 끝나가고 있었고 농민회의 건설이나 기타 민중운동에로의 조직력 이전이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톨릭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장선생님과 지주교님께 말씀드려서 이해를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 때에 가끔씩 나타나는 시커멓고 불길한 그 그늘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뒷벽면의 흰빛이 눈이 멀 듯 강렬하게 나를 엄습하는 것. 일종의 흰빛과 검은 그늘의 심상치 않은 분열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두분께 알리지 않았다. 알려봐야 실감이 가는 얘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내심 무엇인가 정신적인 어떤 징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다. 술과 집안에 대한 내적 갈등이 화근이었다.

내가 '이려정'의 시 한 편을 신문에서 보고 두껍스님과 함께 찾아간 한 시골도시의 컴컴한 여관방 흰 벽에서 열다섯 나이어린 창녀와 그의 스무살 먹은 남자친구가 시골길에 발가벗고 선 채로 극도의 심신의 피로속에서 함께 기도하는 환영과 또 붉고 푸른 움직이는 만달라를 한차례 보고 나서 이윽고 본격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징후였다.

박재일 형도 '한살림'을 건설하기 위해서 장차 서울의 제기동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우리는 탈원주해야만 되었다.

나는 탈원주해야만 되었다.

운동도 탈원주해야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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