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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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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4>

촛불


나의 술과 방랑은 극에 이르렀다.

"왜 그렇게 마시는건가?"

누가 묻는다면 내 마음속 깊이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집이 없다."

"네 그 훌륭한 아내는 어떡하구?"

"그것 때문이다."

"뭣 때문이라고?"

"고통이 너무 심하다. 머리털이 다 빠져버렸다. 나 때문이다."

술에 실리고 방랑에 실리고 노래에 실려 '풍타주 낭타주(風打舟 浪打舟)'였다. 술집 화장실벽에 걸린 거울에 뜬금없이 쓰윽하니 떠오르는 한 화상은 똑 지옥에서 온 사나이다. 두 눈이 퀭하니 들어가고 앞니도 몽땅 빠져버리고 두 볼은 홀쑥 들어간 죽음 직전의 얼굴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계속해서 나를 죽이고 미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잠깐의 아름다움. 잠깐의 즐거움에 몸과 마음을 기대고 있었다.

노래, 노래, 노래!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던 나의 노래! 그것은 마치 내게 섹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잠깐의 멋스러움이 내 목청과 허공과 상대방들의 반응 속에 나타날 때 그 짧은 한 순간 나의 두 눈은 번뜩번뜩 빛나고 볼은 바알갛게 상기되고 어디서 문득 흰 앞니들이 돌아와 예쁜 미소를 화안하게 짓곤 했으니 내 노래는 그무렵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화장실의 분뇨세척수였다.

그무렵에 저 유명한 조용필 아우와의 노래시합이 있었다.

나는 그 얼마전 충북 청주까지 내려가 충북대학의 시인 이동순 아우와 밤을 꼬박 새우며 노래시합을 벌인 결과 내 스스로 항복을 선언했으니 이동순 시인이 뽕짝의 2, 3절까지를 깨알글씨로 메모하여 그것을 들고 설치는 통에 그의 승부심에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조용필 아우는 스스로 원주에 내려와 한 술집에서 나에게 도전한 것이다. 많은 곡목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개 그의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그가 항복한 것은 바로 나의 '촛불 패러디'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 〈촛불〉을 한 원주 토박이인 언청이의 소리로 패러디한 것이다.

"내가 한번 호래를 후른다 하면 적어도 호용필이의 홋불 정도는 후른다 이말이야! 잘 들어봐!

흐대는 훼 홋불을 히셨나요?

흐대는 훼 홋불을 히셨나요?

연약한 이 마음을 후가 후가 히히려나―!"

'홋불'보다도 더 우스운 일은 그 이튿날 새벽 원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조용필 아우를 연행해다놓고 당국이 공갈협박을 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김지하하고 놀지 말 것! 계속 놀면 너는 그때 무대에 못선다는 것! 가수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김지하와 인연을 끊을 것!

중요한 것은 조용필의 태도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내게 그런 사실을 전화로 알린 것이 다른 사람 아닌 조용필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심지가 있는 아우였다.

한번은 자기 집에 가자 해서 한밤에 들러 부친을 뵈었을 때 대강을 짐작했다.

옛학문을 한 양반이었다.

뼈대가 있었구나!

예전 술마시고 훨훨 날아다닐 때처럼 친숙하게 대하고 호형호제 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지금도 조용필을 나의 친아우처럼 생각한다.

〈돌아와요 부산항〉 〈촛불〉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

그의 노래는 나의 기쁨, 비록 짧은 것이었지만, 순수한 기쁨의 원천이었다.

이제 나는 노래나 술과는 높이 담을 쌓았지만 그의 노래만은 맨정신에 들어도 좋다.

그무렵 나는 술만 마시면 실수 연발이요 훈계병과 짜증병에 걸려 같이 마시던 후배들이 찔찔 울면서 도망가게 만들곤 했다. 나는 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이라는 것! 내겐 절대절명의 빙벽과도 같은 어떤 삶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었다. 마치 눈쌓인 킬리만자로의 최정상에 홀로 올라가 얼어죽은 표범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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