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른바 진보주의자거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었다. 출신성분도 대강 중산층이요 츠루미(鶴見) 교수는 그중에도 귀족에다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 졸업자다. 세련되고 섬세하고 양식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영 엉뚱한 작가가 한 사람 반도에 왔다. 아니 그는 반도에 오지 않고 고대의 동이문화(東夷文化), 큐슈와 동북지방의 환문화(桓文化), 그리고 그 하대(下代)의 나라(奈良)나 교토(京都)의 백제정신(百濟精神)의 영적 관련 지역에 발을 디뎠을지도 모르겠다. 나까가미 겐지(中上健次)가 바로 그다.
그는 피차별부락, 즉 백정(白丁) 출신이다. 그와는 수없이 여러 번 만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은 단 세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는 전주 대사습에서 그를 만났을 때다. 전주의 술집 골목에서 작가니 시인이니 모든 사회적 레테르는 떼어버리고 우리 둘은 자연인으로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불렀다.
그는 대취해서 평소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마구 드러냈다. 하나는 그가 한국인인 어떤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고 여럿이 있는 술자리에서 자기의 암동모(동성애의 여자편에 속하는 친구)인 '사브로(三郞)'에 대한 자기의 축축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 점이다.
그는 도시개발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전주의 해장술집골목에서 그가 머리속으로 그리는 태생지(胎生地)를 발견한 듯이 보였다. 도무지 즐거움밖에 보이질 않았으니, 그 즐거움은 사랑의 슬픔과 암동모의 배신, 그리고 구슬픈 향수와 심지어 낯선 땅에서의 여수(旅愁)까지도 포함하는 즐거움이어서 그의 얼굴이 그렇게 천진하고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천하의 추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모습인데도 말이다. 그는 전생에 한국인이었을까?
또하나의 기억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아사히신문의 간사이(關西)지방 간부 한사람을 접대하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온 아사히 한국 특파원을 마치 옴쟁이라도 다루듯 거칠고 사납게 구박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모습과 분위기에서는 피차별부락 출신으로서의 원한과 증오심이 활활활 타오르는 듯했으니, 나는 좌중을 웃기는 곱사춤을 추고 또 그가 그 춤에 매혹되어 순간이나마 구박하기를 멈추는 속에서까지도 그가 현대 일본의 한 뚜렷한 반항적 정신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가 언젠가 한 말이 있다.
"한국의 작가 중에 민중작가는 한사람도 없다. 술집, 밥집이나 구두를 닦는 거리에서나 술집, 밥집의 심부름 하는 여자들, 구두닦이에게 경어(敬語)를 쓰는 자를 하나도 못봤다. 모조리 반말이었다"고 토설한 적이 있으니 그것은 일단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지만 그 정신 안에 원한이나 증오감, 적대의식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의 관찰일 수는 없을 터였다.
마지막 하나는 나와의 인터뷰다.
그는 나와의 첫 인터뷰, 아마도 《문예춘추(文藝春秋)》를 위한 인터뷰였을텐데, 그 인터뷰에서 나의 저항적 삶의 태도 안에 있을지도 모를 지식인 나름의 중산층적인 위선이나 이중성의 낌새를 맡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한 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다 끝났을 때 그 테이프가 녹음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나는 즉시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고 그는 무엇인가를 도둑맞은 사람처럼 멍청해 있었던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러나 훗날, 러시아의 쿠데타 실패와 동부 유럽의 연쇄적인 공산정부 붕괴직후 《중앙공론(中央公論)》을 위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게 가슴을 크게 펴면서 가라사대,
"공산당이 망할 때 진짜 공산주의자가 태어나는 것 아니냐! 나는 이제 공산당에 입당해서 진짜 공산주의를 하겠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도 그는 태연히 술을, 독한 술만 마시다 갔다.
그렇다.
그는 반항인이었다.
내가 읽은 그의 책은 두 권밖에 없다. 소설 《봉선화(鳳仙花)》와 가마다(鎌田) 교수와의 대담집 《언령의 천지(言靈의 天地)》다. 두 책에서 내가 느낀 동일한 결론은 그의 평생의 가슴속 주제가 일본적인 체제와 질서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어떤 혼돈적인 독특한 질서가 끊임없이 분화구를 찾아 폭발의 날을 기다리며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 같다. 한 다큐멘타리영화에서 그의 고향 '구마노(態野)'의 청년들과의 대화장면이 있는데 그곳에서 움직이는 일본 피차별부락의 일반적인 감정은 우리는 잘 알 수 없으나, 예컨데 김단야(金丹冶)가 동학에서 백정들의 계급해방운동인 형평사(衡平社)로, 형평사에서 고려공산당으로 이동했듯이 나카가미 겐지라는 한 지도자를 통해 탁월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영성적 공산주의로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재미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중앙공론사의 저 유명한 미인 미야다 마리에 씨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미녀와 야수'인 셈인데, 그들 두 사람의 정신사 속에 일본 해방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츠루미 스케 교수는 그의 책 《일본 제국주의 정신사(日本 帝國主義 精神史)》에서 미래의 일본을 해방할 집단은 여성들과 피차별상태의 소수집단이라고 못박고 있다. 아마도 그 예견은 적중할 듯싶다. 그러나 그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방은 반드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특히 한국민족과의 보다 깊은 연관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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