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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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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1>

사상기행

운동이 장기화하면서 민족의 민중운동사 특히 동학혁명사에 대한 사회경제사학의 논문과 책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나의 불만은 굉장히 컸다. 도대체 동학혁명에 대한 사회경제사학의 접근자세부터가 문제였다. 아직 자기들의 사관도 검토하지 않은 채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론'의 뼈대에 꿰맞추기 위해서 고무신에 안 맞는 큰 발을 자르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사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 역사적 진행에 관한 엄정하면서도 치밀한 자료발굴 및 사료해석을 전제함이 없이 겨우 문헌자료 몇 가지를 가지고 때려잡으려는 젊은이들의 들뜬 사안(史眼)이나 여기에 비위 맞추는 기성사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큰 문제였다.

북접의 최시형 그룹을 반동으로 보고 남접의 전봉준을 불세출의 혁명영웅으로 우상화하는 태도는 매천 황현(梅泉 黃炫)의 혹세무민관의 또다른 반복이요 엄정한 과학적 사관에서 용인될 수 없는 야담류의 영웅주의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수운과 해월의 사상 및 수련, 그리고 조직과 합법적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을 전제함이 없이 그따위 사이비 종교는 혁명가의 이용대상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사회역사적 모순의 폭발로서의 민중폭력을 전봉준과 그 계꾼 또는 두레패가 조직했다는 식의 동학혁명의 전위주의·지역주의·전라도주의는 1894년 1월에 터져서 그해 12월에 사라진 농민폭동만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시간적으로 고립시키는 꼴불견을 연출한 것이다. 월북한 박태원(朴泰遠)의 아류들이었다.

사상, 수련, 조직, 합법적 대중운동의 단계 없이 무장폭동만 달랑 떼어 혁명시하는 역사의식이란 것이 과연 역사의식인가?

도대체 남접, 남접하는데 그 남접의 시작은 어디인가? 그리고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의 민중사적 기원과 배경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경제나 신분적 모순 문제는 상식에 속한다. 그런 상식만으로는 그때 인구 불과 천만여 가운데에 수백만이 봉기하여 30만 내지 50만이 살륙당한 혁명의 역사를 제대로 해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학에 대한 그따위 속물적 이해는 지금 진행중에 있는 민중민족운동이 막대한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도 되는 것이다.

나는 말과 글로 이같은 견해를 누누이 밝혀왔다. 당시 이문구 형과 송기원 아우가 맡고 있던 실천문학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나에게 삼남(三南)지역에 대한 사상기행을 제안해왔다.

나는 이 제안을 수락하면서 세 가지 초점을 제시했다.

첫째는 동학사상 탄생의 민중사적 배경과 그 징후들의 탐색

둘째는 수운 동학과 동학혁명사의 접점인 남접조직의 남상 확인

셋째 동학혁명의 민중사적 전개 계승과 현대 세계사적인 의미 탐구이었다.

우리는 첫번째의 탐색을 위해 계룡산, 모악산, 지리산의 민중사를 검토하였고 기타 거기에 직간접적 연관을 가진 역사적 사건과 지역들을 둘러보았다.

두번째의 확인을 위해 남원 남문 밖의 교룡산성 은적암과 남원 시내의 동학의 흔적을 혁명사와 연관시켜 확인하려 하였다.

세번째의 탐구를 위해 김일부의 정역(正易)과 강증산의 천지공사운동 등을 비교검토하고 그 현대사적 의미나 세계사적 미래를 탐구하였는데, 이 세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몇해 전 '사상기행 제2부 기획'중에 시인 황지우 아우와의 장장 10시간 여에 걸친 대담을 통해 가능한 한 상세히 논의하였다.

일행은 이문구, 송기원, 장선우, 임진택, 두껍스님, 나와 내 아내 김영주, 이렇게 일곱 사람으로 운당여관에서 출발하여 운당여관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3개도를 돌았고 여러 사람을 만났으며 많은 사적을 발로 밟아 지나왔다. 내용은 실천문학사가 간행한 《사상기행》 2권에 나와 있어 생략하고 단 세 가지만 여기서 강조해 얘기하겠다.

하나는 남접조직의 남상으로 내가 지적한 남원의 향토사는 그 지역과 동학 사이의 이미 정설화된 역사까지도 전면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기야 족보에서까지도 동학하던 일문을 깎아냈던 판에 그쯤이야!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 동네는 동학과 아무 관계도 없다'라는 '아니다'의 주장이야말로 대개는 반드시 그와 정반대로 '우리 동네는 바로 동학의 씨밭이었다'라는 '그렇다'의 대답을 뜻한다는 역설을 깨달았다. 그것이 민중혁명사의 한 법칙인 것이다.

둘째는 동학사상은 경상도 경주에서 발상하였는데 민중사적으로는 그 예감이 당시로서는 경주와 교통이 두절되다시피한 상황이었을 계룡산, 모악산, 지리산 등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거꾸로 동학혁명 이후의 그 사상적인 변화발전이 도리어 바로 그 쑥밭이 된 지역 인근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사상과 그것의 혁명적 실천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한 역사적·지리적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셋째는 우리가 진보주의와 역사주의적 사관을 쫓느라 간과했던 고대사상의 근대적 부활과 근대의 창조적인 민중민족혁명 사이의 친연관계, 즉 풍류선도의 맥락에 관한 연구가 강화됨으로써만 사상과 군중운동 폭발 사이의 정신사적 관계가 설명될 수 있다는 암시를 받았다.

마지막 한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수운이 남원의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에겐 늦게야 확인되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남접의 조직 개시는 불을 보듯 뻔한 사건이다.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윤석산의 〈후천을 열며〉 가운데는 그무렵의 남원 제자들의 이름까지 상세히 밝혀져 있다.

지금도 반성하고 있다.

나는 기행 도중 너무도 과음했고 송기원 아우에게 결례했으며 이문구 형을 혹사시켰다. 내 생전에 다시 사상기행이 있을 리는 없고, 나의 후학들이 다시 기행에 나설 경우 술 때문에 간과했을 미묘한 매듭이나 사소해 보이는 연결고리 등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조언하고 싶다. 왜냐하면 폭풍과도 같은 동란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예전에 왕성했던 동식물들이 그무렵 어렵사리 씨를 떨어뜨린 유아기의 생명이 이제 막 역사적 신출내기처럼 또는 틈새식물처럼 앳되게 자라고 있기 마련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하!

그러나 이문구 형의 그 탁월한 명문장으로 엮은 사상기행은 그무렵 실천문학에 제1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당시의 사회경제사학도를 자처하는 수많은 맑스보이 동학연구자들의 압력과 협박 때문이었다.

그러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누군가가 압력과 협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인가? 신화를 전면 거부하고 이른바 과학의 미명을 빌린 사상과 담론의 운명이란 때가 가면 수정될 수밖에 없는 실험실과학의 처지를 못 벗어난다. 지금에도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론을 과학이라고 감히 우길 사람이 있는가?

이미 토마스 뮌쳐 연구의 방향 자체가 변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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