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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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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9>

두사람

술과 관련된 기억으로는 원주의 천하태평집이 잊히지 않고 찻집으로는 '청자다방'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게 잊을 수 없는 서울의 여관이 한군데 내 기억 속에 둥지를 틀고 있으니 운현궁 뒤편 운니동의 '운당여관(雲塘旅館)'이다. 그 한옥의 여관에서 그 피곤한 시절, 후배들과 밤새워 꿈을 꾸거나 밤새워 술마시거나 대낮 내내 떠들거나 욕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놀았으니 어찌보면 무심한 구름이요 어찌보면 허망한 물결이었다.
운니동에는 내시들의 숙소가 있었다 하니 그 또한 이상하다. 일종의 허무함이 그 방들, 그 벽들, 그 마루와 창호에 새겨져 있었으니, 그 허무는 그 무렵의 세월의 이름인가? 고자와도 같이 불모(不毛)한 내 40대 삶의 고적한 공간에 붙여진 이름인가?

나는 이미 감옥 안에서, 그리고 출옥후엔 원주에서 나의 갈 길을 새롭게 정립한 바 있다. 민중 주체의 민족운동은 이미 20대부터의 나의 길이었고 그 길에서도 이전보다도 한 차원 높은 곳에 생명운동과 영성운동이 있었으니 당분간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뭐라 뭐라 나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이 한 유행이었으나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아냥이었으므로 그들의 일이지 나의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치고 있는 위험을 알면서도 모른 체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해 가까운 시일 안에 김근태 아우와 이부형 형의 청년운동과 전선운동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김근태 아우를 불렀다. 운당여관에서 대좌했는데 근태 아우는 그 위험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할 작정인 듯했다. 그때 느낌이 그는 나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거리는 여러 가지를 뜻했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돌파의 용기만은 지금도 인정한다. 이부영 형은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곧 남한과 북한의 두 권력에 대한 상당히 차원높고 강도높은 비판적 문건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이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가 얼마 안 가 큰 차이가 났으니 터럭만한 차이가 천리의 거리를 만드는 격이었다. 근태 아우는 극심한 고문과 함께 극좌로 몰렸으나 이부영 형은 수사기관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그 뒤로도 그의 행로에 이 점은 중요한 참고요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병법의 배려나 고려없이 언제나 학생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너무 정략에 흐르는 것도 문제지만 소위 운동권 티를 못 벗는 것도 숙고해야한다는 말을 꼭 붙여두고 싶다. 입장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호라! 내가 정치판에 안 끼어든 것을 요즘처럼 잘한 일로 절실히 생각하기는 내 평생 처음이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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