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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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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8>

바가본도

'바가본도'라는 찻집이 그 골목에 있었고, 그 골목이 끝나는 곳에 한 작업실이 있었다. 벽과 천장, 마룻바닥과 이젤, 종이와 옷들 위에까지 왼통 그림이었다. '바가본도'는 여자다. 약간 미치광이 여자다. 그 미치광이와 나는 가끔 소주를 사들고 수유리 쪽 방앗골에 있는 연산군 묘지를 간 적이 있었다.

"늬 할아버지한테 인사 여쭤라!"

'바가본도'는 그 희한한 덧니를 허옇게 드러내고 살풋 웃으며 무덤 위에 소주를 붓는다. 그리고 '이배 반'을 올린다.

내가 '바가본도'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천하의 추녀(醜女)로서, 자기의 추함을 전혀 개의치 않고 참으로 미친 그림을 제멋대로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생김새와는 전연 딴판으로 최양숙의 구슬픈 엘레지를 멋들어지게 부를 줄 알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새가 와서 그녀 어깨 위에 앉아 기도하고 때로는 다람쥐나 들쥐가 와서 그녀의 무릎 아래 고개를 기웃이 숙이고 웅크리던 것이다. 그날, 기억에 남는 것은 한 겨울날의 노을 무렵이었다. 연산군 묘지 앞 잔디에서다. 둘이서 소주를 세 병이나 깠다.

마로니에 나뭇잎에 잔별이 지면
정열의 불이 타던 첫사랑의 시절
눈물 머금고 이별하던 밤
아아 아아아 흘러간 꿈
황혼의 엘레지이―

황혼이 되면 지금도
가슴에 타는 사랑의 아픈 상처
……

그녀가 없는 텅 빈 그녀의 작업실에서 새우잠을 잔 일도 두 번 있다. 곁에 친구나 애인처럼 빈 소주병을 놔둔 채.

그녀는 프랑스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몇번인가 도미에와 로트렉과 샤피로 등의 그림엽서를 보낸 뒤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세느강의 어느 다리 위에서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가본도!'

그녀에게 나의 대학전공이었던 카알 로젠크란츠의 '추(醜)의 미학'이나 아돌프 루텐버그의 '질병의 미학'을 얘기해줄 때 그 이상하게 생긴 덧니를 허어옇게 드러내며 씨익― 웃던 게 기억난다. 그래! 그 웃을 때 모습 하나만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으니 '미추'가 어디 따로 있더냐? 더욱이 영원한 그 숭고한 '바가본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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