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내 집이 없었다. 물론이지만 내가 편한 마음으로 묵을 친구집도 없었다. 다만 한군데 서울의 서북쪽 '찬 우물'에 점치는 후배 부부가 살고 있어 술취한 밤, 술깨는 새벽이면 문득 찾아가 서너 시간 잠자고 한술 얻어먹고는 또 다른 술자리를 찾아 떠나곤 했다. 찬 우물! 찬 우물! 찬 우물!
그 집엔 조그마한 채마밭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상추나 쑥갓 같은 것 대신에 아뿔싸! 붉은, 붉은 저 샛붉은 꽃 양귀비를 심어 씨를 내어 감추는 채마밭이 있었는데, 파는 건가? 먹는 건가? 아니면 감상하는 건가?
양귀비밭이 하나 있었는데 점쟁이 남편이 파고다공원에 점보러 나간 뒤, 그 점쟁이 아내는 한쪽이 안 보이는 애꾸였는데, 그 아내는 외눈으로 양귀비 씨를 발라내곤 했는데 그 일을 할 땐 꼭꼭 문을 잠그고 한 노래를 불렀으니, 슬픈 노래 한 곡을 꼭꼭 부르곤 했으니, 왈
슬픈 여음 전설처럼 지니고
양귀비가 다시 피어납니다
양귀비의 꽃은 님을 병들게 하고
양귀비 들창 앞에 피던 날
님은 날 버리고 가셨드랍니다.
양귀비가 피면
내마음에 함박눈이 내립니다.
별처럼 함박눈이 내립니다.
언젠가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허공으로 열린 창문 유리 위에서 외눈이 떠 있었다. 왼쪽 눈, 외눈, 그 검은 눈속 깊숙이 거기 샛붉은 양귀비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는데, 아아, 순식간에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와락 들어서 후닥닥 일어나 집을 뛰쳐나온 뒤, 다시는 그 집엘 가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런데 그 양귀비는 파는 건가? 먹는 건가? 아니면 감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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