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무렵 왜 그리도 외로웠을까?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 때문에 매일 술 없이는 살 수 없었으니 곁에서 보기에도 딱했으리라!
윤배 형님을 몇번 만난 뒤, 내 스스로 만남을 피했다. 사나운 짐승도 상처를 받거나 사냥꾼에게 쫓기면 동굴에 깊이 숨어 얼굴을 내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윤배 형님 뵐 낯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무렵 모처럼 한 여름날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강릉 경포대에 수영하러 갔을 때 우연히 그곳에서 형님을 뵈었다.
어쩐지 건강해뵈질 않았다.
형님은 웃으며
"참 좋다. 네가 가족 데리고 해변에까지 오다니 이젠 안심이다. 그 사이 걱정 많이 했는데…… 참 좋다."
나는 참으로 궁금한 소식을 물었다.
"이종찬 선배는……?"
"잘 있어. 염려 놔!"
이종찬 선배는 그무렵 여당의 큰 재목으로 성장일로에 있었다. 혹시라도 누를 끼칠까 봐 안다는 소리도 어디 가서 입 뻥긋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게 옛, 옛, 그 최선생의 말처럼 '삶'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웬일일까? 윤배 형님이 어쩐지 건강해뵈질 않았다. 취한 것인지? 내 귀를 잡고 낮은 소리로 한 마디,
"내가 몇 억 벌었어! 한 삼 억 줄 테니 영화 하나 만들어봐! 광산영화 말이야."
어쩐지 건강해뵈질 않았는데 역시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 해남에 낙향해있을 때 형님의 별세소식을 들었고, 그것이 간암 때문임을 알았을 때,
"아하, 영화!"
실없는 생각이었다.
김영삼 정권 때던가?
어느날 새벽에 환경운동연합이 주최하는 롯데호텔의 조찬모임에 갔다가 거기서 참으로 오랜만에 이종찬 선배를 만났다. 아무 소리 없이 둘다 굳은 얼굴을 하고 한번 악수로 그만 또 헤어지고 말았으니 언제 또다시 그 무슨 난새와 생황의 인연이 있어 붉은 구름 사이에서 만나려나?
왜 그리도 외로웠는지, 왜 그리도 괴로웠는지, 왜 옛사람들은 그리도 만날 길이 없고 갈 길만 그저 아득했는지?
아아,
이것이 최선생의 바로 그 '삶'이라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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