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사건을 감히 '원주사변'이라고 부르겠다.
허씨가 나에게 그런 집요함을 보이면서도 계속 원주를 두들기려고 눈독들이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잘한 짓인가?
자기들이 변변하고 떳떳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주는 이미 '생명운동'을 표방하기 시작했고, '수동적 적극성' 또는 '솔라 페시브'를 전략으로 선택한 지 오래였으니까. 농담이 아니다. 공연한 헛수고든가 정보망이 엉터리던가 둘 중의 하나다.
비록 광주사태의 수배인물인 김현장이 원주수련원에 숨어 있었고 또 원장인 최기식 신부의 주례로 그가 원주의 한 책방 주인 영애와 결혼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사방에 난리를 일으키며 가톨릭 원주교구를 빨갱이 소굴로 지목하면서까지 근 한달에 걸친 대규모 매스컴 플레이를 벌일만한 사건이 되는가?
또 그 과정에 수련원 뒤뜰에 쓰다 버린 가톨릭농민회 피켓의 그 약간은 과격한 구호들을 신문 사진으로까지 클로즈업해서 원주의 붉은 소굴을 소탕하자는 난리굿을 벌일 만한 정치적 절박성이라도 있었는가?
안다.
그때 이미 우리도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정보채널이 있었으니까.
장선생님의 참모였다가 결정적인 하자 때문에 원주 캠프에서 숙정당한 이인창 씨가 허씨의 오른팔이라는 것. 그 이씨가 그 무렵 소위 정권의 핵이었던 '관계기관협력회의'에서 '원주캠프 브리핑'을 통해 무슨 빨갱이집단, 전위당 모양 원주의 계보를 그리고 '장일순―대통령', '김영주―총리', 또 누구는 무슨 장관, 또 누구는 무슨 장관 하며 유치한 짓거리를 한 것까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제일 우스운 것은 김지하를 특수부대장으로 별동대화 시켰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서울에 올라온 나는 허씨에게 간접전화를 했었다. 명동성당에서 막 추기경님을 뵙고 모종 중대결심을 굳히고 나오는 길에 중앙극장 뒷골목 공중전화박스에서였다.
"결정하라고 하시오. 김지하가 다시 감옥에 가는 게 좋으냐 아니면 평화롭게 술이나 마시는 게 좋으냐고. 곧!"
고맙긴 하다.
바로 그 뒷날부터 매스컴을 통한 원주공격이 중단됐으니까.
자랑이 아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소위 5공시대의 정치력, 허씨가 그리도 자랑해쌓던 이른바 김춘추의 준비된 정치력이라는 게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고 내가 그따위 브리핑에서까지 특수부대장으로 올라간 것을 개탄해서다.
공중전화박스를 나섰을 때 저무는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내가 내뱉은 말 한마디가 있다.
"부끄럽다."
적이라하더라도 좀 능란했더라면…….
내가 이 사건을 원주사변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가 따로 있다. 나의 스승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너무도 괴롭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앞날을 크게 걱정해서 그 뒤 곧장 상경하여 악어형, 곧 한기호 형님과 함께 허씨를 만난 것이다. 난초를 그려주며 선생님이 허씨에게 건넸다는 그 한마디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눈에 피눈물이 흐른다.
"이봐 문도! 나 용돈 좀 주게!"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정치요, 정치의 결과다.
장선생과 같은 민족의 큰 어른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일인가?
할 말 있는가?
지금에 와서도 저 유명한 불패불굴의 충성심과 자긍심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말하자!
그것이 도대체 정치력인가?
춘추에서는 그런 경우를 뭐라 지적하는가?
오해없기 바란다. 시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회고록이다. 이렇게밖에 회고 안되는 것은 나의 죄던가? 그토록 견인한 내탓이던가?
그러나 글이 여기에 이르러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멀리 길고긴 한강이 벌판을 가로지르고 그 너머 김포의 작은 산들과 아득한 강화의 산들까지 보인다. 그 너머는 황해바다다.
누구 말처럼 동아시아의 지중해다. 거기에 우리 민족의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내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 있다.
'헛되고 헛되고 또한 헛되도다.'
나는 이미 허문도 씨를 미소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는 좀 별난 사람이었다.
'불패불굴의 사나이'라는 신인령 교수의 말한마디가 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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