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에서 파시스트들인 '대령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메리나 메르쿨리의 예술적 저항이 기억난다. 메르쿨리는 그것을 특별히 '대령들의 반란'이라고 명명했다.
5 공 또한 대령들의 반란이었다. 대령들은 어디에서든 나타났다. 술자리나 밥자리, 찻자리, 사무실과 성당, 사제관과 가톨릭센터, 수련원 등 도처에 대령들은 나타나 엄포와 회유의 양날칼을 휘둘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군종신부인 가리누스 김신부가 끼어 있어서 일방적으로 튕기거나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그때 세상의 주역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대령은 우리 원보를 육사에 보내라고 강변 강변했다. 참으로 나의 그 질긴 견인력이 아니었더라면 반드시 말로 표정으로 구역질을 표현하고 말았을 심한 모욕이었다. 원보를 육사에 보내라니! 이 세상에 시인이며 수도자가 들어가는 육군사관학교도 있다던가?
한번은 1군사의 한 장군이 지주교님과 우리 부부를 자기 집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안 갈 도리는 없어서 초대에 응했는데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이었다. 먹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계속 지껄였으니 편했다.
나는 어려서 군인 그림을 많이 그렸고 한때 군인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식사의 초대 이후 나는 군인에 대한 흥미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군인은 전투복을 입었을 때가 제일 좋다. 좋다기보다 미덥다. 그들이 깡통훈장을 너절하게 늘어뜨리고 금빛 번쩍이는 예복을 입고 사교적인 언사를 쓰기 시작했을 땐 이미 무언가 잘못되는 것이다. 군인들의 칼 길이가 짧아지고 그들이 도성 안을 활보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던가?
더욱이 그 장군이란 이는 경상도의 어떤 한 사람을 한 돌팔이의사와 함께 나에게 보내 내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며 여러 번 여러 번 나를 서울의 타워호텔로 이끌어 무슨 암호를 끊임없이 종이 위에 그리면서 끝도 없이 제 공치사와 나의 무모함과 5공정권의 강력함을 떠들어대고 뽐냈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었다. "당신들 치료는 효험이 없다"고 싹뚝 잘라버리고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러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다.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혹은 공갈과 함께 오고 또 오고 또 다시 올 것이다. 나는 서서히 걷어내고 또 걷어내고 또 다시 걷어낼 것이다.
그들은 지주교님, 추기경님께도 똑같이 그렇게 하며 장선생님과의 이간을 꾀했으니 그 모든 것이 배후의 참모조직, 정보조직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을 한번 보아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그들의 본성인 '칼'을 드러낼 날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실제로 가까이 오고 있었으니 바로 저 유명한 허문도(許文道) 씨가 나를 찾아 원주집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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