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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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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0>

담론들

기억이 가능할 때 그 기억들을 정리해둬야 한다.

조영래 아우와 함께 이미 민청학련 때부터 당기능을 가진 전선, 즉 전선당에 대해 논의해왔다고 했다. 그것은 종교계를 포함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해외 세력 및 대중적 민중을 포괄하는 넓은 전선이로되 그 중추기능은 전위당이 아니라 전선당으로서 그 당 기능 내에서는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한 여러 철학, 과학들과 종교들, 예술과 문화이론들이 서로 논쟁하고 서로 공방하면서 서서히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창조해나가는 그러한 살아 생동하는 과감한 정치체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민청학련사건으로, 그리고 그 뒤 잇단 사건들로 나와 조영래 아우 및 기타 지도적인 선배들이 현장에 없음으로써 7년여의 긴 공백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광주사태가 터졌고 투쟁은 필사적인 것으로 되고 치열해졌다.

시뻘겋게 피칠한 광주의 그 미칠 듯한 나날 속에서 20대 청년들은 자기들을 적절히 이끌어줄 선배들을 찾을 수 없었으니 그들은 도리어 선배세대들의 민중사상을 비판 폄하하고 혁명적 전위주의와 분파주의로 상황에 대응하게 된 것이다. 20대 신진의 자칭 혁명가들이 해방 직후의 말똥종이 책이나 영어, 일본어 번역본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루카치에 부하린까지 들고 나옴으로써 운동의 법통이나 정통성 따위는 다 걷어치우고 뜬금없는 세대론을 목청 높이 외쳐대며 지하에 수십 개의 지도부가 난립하여 이론투쟁을 서슴치 않았으니 해방전 한반도 내의 그 자살적인 종파투쟁을 방불케 했다.

이미 민중주체의 민족사상 위에 생명론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들의 한없이 소모적인 엘리트주의적 이론투쟁과 종파투쟁, 그람시나 알튀세르 같은 변형까지,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이론과 김정일의 종자론까지, 그러니까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하는 듯한 그 투쟁, NL이니 PD니 NLPD니 하는 분파와 전위중심주의를 납득,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들과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설령 그들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는다 하더라도 내 눈엔 이미 한없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소수의 편벽된 담론일 뿐이었다.

때는 이미 생명과 영성의 시대로, 명상과 변혁의 상호보완시대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고, 그 길에서 동서양사상의 새로운 종합, 고대와 미래의 탁월한 통합이 요구되고 있었다.

자연과학은 이미 불확정성과 상대성이론에까지,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의 물리학에까지, 자유의 진화론과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에서 생명의 차원변화론을 포함한 최신의 생물학까지, 카오스 이론과 퍼지이론과 프랙탈이론이 휩쓸고 철학에서도 니체와 푸코 이후 들뢰즈와 가타리, 미셀 세르에 이르기까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생태학에서 드볼 세션의 심층생태학과 머레이 북친 및 루돌프 바로의 사회생태학은 이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적 변혁론과는 큰 획을 긋는 새로운 생태계변혁론을 주장하며 문명사의 거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무렵 동학과 생명론 탐구를 제창하면서 최초의 산문집 《밥》을 펴냈다. 《밥》은 분명 하나의 중요한 담론집이었다. 그러나 소수만이 그것을 이해했을 뿐, 책은 많이 나갔으나 그 담론으로서의 가치는 고의적으로 묵살되었다. 이어 나온 《남녘땅 뱃노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글이 발표될 때마다 비판이 아닌 순전한 비아냥이 늘 뒤따라 다녔으니 그것은 모두 하나의 '엘리트병'이었다.

문화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급한 선동을 예술의 정치성이라고 착각하고 예술을 감히 투쟁수단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많았다. 미학은 낡아빠진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로 되돌아갔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있었던 것이 바로 안성 청룡사(靑龍寺)에서의 1박2일의 문화운동 토론모임이었다. 나는 그날 채희완 아우와 함께 평소의 문제점을 다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미학적 대안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젊은 그들은 집권도 하기 전에 검열제를 창설했으니 《공동체》라는 잡지에 저희 입맛에 맞는 얘기로 완전 재편집하여 단 1회로 취급하고 끝냈다.

문화운동은 '거덜난' 것이다.

청룡사를 거점으로 했던 옛 조선조의 남사당패들, 뜬패의 넋들에게 몹시도 부끄러웠다.

그무렵 《창작과비평》은 문예지인지 시사평론지인지 구분이 안 가는 편집이었는데, 실천문학사에서 초청한 〈민중, 민족, 문학〉이라는 제목의 대담에 나가 창비의 백낙청 씨와 긴 얘기를 나눈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구체적인 것들은 다 증발해서 날아가고 없다. 다만 백씨가 민중운동 및 민족문학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데에 비해 내가 마르크스 일변도의 문화담론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고 민중민족문학 안에서도 새로운 상상력 탐색 쪽으로 기울었던 것만 기억난다.

왜 그랬을까?

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가?

왜 창비와 나는 항상 일치할 듯하면서도 서로 비켜나가는가?

아마도 그들은 시사평론가들이요 나는 원론탐색가이며 그들은 근거지에 머무는 현실주의자들인 데 비해 나는 그저 항상 먼길 떠나는 나그네이기 때문인 듯하다. 견해의 차이라기보다 그것은 일종의 숙명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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