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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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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9>

벗들, 아우들

출옥후 두 해인지 세 해인지 거의 매일같이 둘 혹은 세 패거리 정도씩 벗들, 아우들, 민주화운동 인사나 종교계 사람들, 그리고 대학생 간부들이 몰려와 밥이나 술을 먹고는 돌아갔다. 밥상, 술상을 눈코뜰새없이 날라야 했던 내 아내에게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들의 얘기란 다 똑같은 것이었으니 나더러 반5공운동의 대장을 하라는 것이었고 하다가 또 감옥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첫째 나와 자기들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 원주와 서울이나 광주의 상황이 판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셋째, 직업정치가들이 주류였던 박정권 말기와 군 영관급들이 주류를 이룬 5공정권 사이의 병법적(兵法的) 차이를 계산하지 못했다.

그들이 대개 주장하고 공감했던 '지성의 유격전'이 옳다고 하자. 옳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유격전인 한에서는 역량의 소모를 막으면서 동시에 역량의 보전을 도모하고 가만히 잠복함으로써 서서히 피동을 넘어서야지 함부로 자살과 투옥을 무기로 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감옥가기는 박정권 말기에나 적용되는 전술이지 5공 초기에 합당한 전술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난폭하고 무자비하고 영악스러운 병법집단이었다. 소위 운동권 사람들은 담론 자체부터가 이미 우리네와는 생소하였다. 그럼에도 나에게 껍데기 대장 노릇을 하라고 우겨대었고, 늙은이답게 젊은이를 위한 선동연설이나 하라고 덤볐다.

그들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네 사람인데 나병식 아우와 김근태 아우가 한 그룹이고 이부영 형과 최열 아우가 또 한 그룹이었다. 다들 고생 많이 한 사람들이었는데 김근태 아우는 두 번 와서 당시의 청년조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나는 이제 정치가 아닌 어떤 다른 일을 찾고 있노라고 사양했고 나병식 아우는 그보다 더 자주 와서 옛날과 같은 나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했으나 나는 이른바 생명운동의 일개 개척자로서 내 길을 가겠다고 타일렀다. 이부영 형과 최열 아우는 그들과 또 판이했다. 반군부통일전선을 이끌고 있던 이형은 원주와 장선생 그리고 나와 사회개발운동 자체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전선의 일환으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고 최아우는 그 무렵 처음 시작된 공해추방 또는 환경보전운동의 생태학적, 생명론적 기초를 놓으려고 부단히 나와 의논하고 여러 견해를 공유했으니 박재일형들을 통해 생명론이 유기농과 무공해식품 생산 및 소비운동으로 나아가듯이 또 한편에서 최열 아우 등을 통해 환경과 생태학 및 녹색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근태, 나병식, 이부영 형 등의 운동이 결국 야당정치운동으로 수렴돼간 것과는 달리 최열 아우의 환경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생기를 띠면서 발전 확대되어 지금은 전국의 2만여 시민운동단체 중에 가장 커다랗고 가장 활력있는 운동체가 되었다.

아마도 앞날에 있을 원외, 원내의 양면에 걸친 대중적인 민중생명정치운동의 초석을 놓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예감된다.

그밖에 독일 녹색당에서 일하는 한 여성, 독일 괴테 인스티튜트의 두 여성과 타임지의 동경지국장 S. 장 부부, 그리고 해인사의 현응(玄應)스님이 방문객 가운데 기억에 남는다.

그밖에 나를 찾는 대개의 사람들이 한 시대만을 살고 있었고 전환점의 두 시대를 걸쳐서 생각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다들 5공타도에 급급해 생명운동의 앞날을 이해는커녕 예감조차 못했으며 중장기적 담론 개척이나 근현대사에 대한 심도있는 공부는 할 생각이 아예 없었고 단기적인 전술차원의 옥쇄나 난파를 신성한 이념적 차원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니 사람마다 돌격병이요 말끝마다 특공대였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도 사회주의 변혁론 증발 이후 오늘의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권이 반민중적인 연쇄 부패로 파탄나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 직간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함들이었고 이러한 조급증들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내 입에서 정치운동의 중장기적 전망이나 남북통일속에서의 문명융합론 그리고 환경문제에서의 생태학 관련이 나타날 때마다 나타나기가 무섭게 변절, 배신, 반동, 전열이탈, 전열혼란, 생명교 교주 따위의 마구잡이 비아냥과 욕설들이 쏟아지던 것이니 참으로 반지성적인 파시즘은 도리어 소위 운동권 사람들이 더욱 심했다고 기억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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