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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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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7>

무릉계

아내로부터 들어 나의 불면과 번뇌를 조금은 알고 있는 영주 형님이 하루는 내게 며칠간 함께 동해안에 갔다 오자고 제안했다.

동해안! 동해안! 큰 바다! 넓은 바다! 피묻은 흰 손! 불타는 노을바다!

우리는 떠났다.

등에는 자그만 배낭 하나씩 메고. 배낭엔 감옥에서 내가 즐겨읽던 용성(龍城) 스님의 《금강경(金剛經)》 단 한 권과 소주병 하나만 달랑 넣고 갔다.

버스 안에서도 "범소유상 개시허망! 범소유상 개시허망!(汎所有相 皆是虛妄)"을 외며 외며 눈을 감고 갔다.

강릉에서 동해시로 바로 가 하루 묵고 이튿날 아침 두타산 무릉계 골짜기로 들어갔다. 삼화사를 지나 '피쏘'라는 곳에 이르니 맑은 물이 흐르는 커다란 너럭바위들 위에 조선조 때 것으로 보이는 토포사(討捕使) 이름들이 무수히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거기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도둑소굴이든가 반란의 무리들의 거점이었든가 둘 중의 하나다.

유난히 시퍼런 계곡물가에 시커먼 까마귀들이 몰려있는 골짜기 골짜기 소롯길로 걸어올라가는데 이상하게 심기가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 흉한 예감, 또는 어두운 기억 같은 것들이 잇달아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커멓게 타죽은 나무들이 계속 나타나고 커다란 바위들이 파헤쳐져 허연 내장을 드러낸 것 같고 내내 무엇인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소름이 오싹오싹 끼쳤다. 이미 짐작만으로도 이 골짜기가 그냥 평범한 곳은 아닌가 보다 했다. 아까 피쏘에서 보았던 안내간판에 1919년 3·1운동 나던 해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굉음을 내면서 폭우 속에 지금의 계곡이 침강하여 형성됐다고 써 있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피쏘란 곳이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북상한 루트로서 그곳에서 대격전이 벌어져 온골짝이 피로 물들어 이름마저 피쏘로 되었다는 부분 역시 마음에 걸렸다.

계곡 이름을 '화살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기이했지만, 두타산 등성이의 '용추'로 올라가는 대목의 '쇠부처굴'이니 '호랑바우'니 '비리내골'이니 '문깐재' 따위 이름들이 그리고 보니 모두 다 이상했다. 앞서 걷고 있는 영주 형님에게 말을 건넸다.

"기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산을 올라 용추다리 건너 폭포가 쏟아지는 용추바위 위에서 우리는 쉬었다. 가져간 소주병을 따고 한잔 마신 뒤에 문득 주변에 가득찬 원한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고자 용성 스님의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다 읽지 않고 뒷부분 '범소유상 개시허망' 몇줄 앞에서부터 소리내 읽다가 내 소리가 '범소유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물가에서 회오리바람이 휘익― 일어나며 금강경이 바람에 홱 날아가 내 뒤에 있는 큰 바위에 가서 착 달라붙었다. 나는 손을 뻗어 책을 떼어내고 그 책 붙었던 바위 부분을 문득 쳐다보니 아아! 시커먼 바위의 바로 그 부분에 깊이 새겨진 글씨들!

'汎所有相 皆是虛妄!'

소름이 쫙 끼치면서 나는 벌떡 일어섰다.

"형님! 내려갑시다."

"왜?"

"글쎄요! 기분이 안좋습니다. 내려갑시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먼저 터덜터덜 발걸음을 떼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어찌어찌해 동해시의 안광호 선배댁에 도착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날 밤, 안선배 댁에서 술을 마시며 선배에게 무릉계 내력을 대강 들었다.

무릉계가 흘러내리는 두타산의 산성터는 6·25전쟁 때 인민군의 피복창이 일곱 군데나 있던 본거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국군수복 때 게릴라들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동해시 쪽으로부터 해병대가 상륙하여 무릉계라인을 가로지르고, 부역자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그 인근의 옥계(玉溪) 등 모든 골짜기 주민들 오천여 명을 한꺼번에 무릉계에 몰아넣고 봉쇄한 뒤 기름을 뿌리고 비행기가 소이탄으로 기총소사를 가하여 모조리 태워죽였다 한다. 그래서 그 근처 부락들의 집집이 제사가 모두 한날 한시라고 한다. 흰 박꽃이 달빛 아래 살풋 피는 여름밤에 귀신들이 밥 먹으러 돌아오는 사맷골 제사는 그러나 그 시작이 궁예와 왕건의 삼국통일 때까지 올라간단다. 그무렵 강릉 등 명주(溟州) 지방의 예족(톯族)들이 집단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는데 만주나 일본으로 간 흔적도 없고 보면 태백산, 두타산 쪽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고 산성에 우물터가 오십군데나 된다고 하니 확실하다고도 했다. 예족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산성과 골짜기에 도둑과 반역의 무리들이 웅거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밤 나는 내내 심안 위에 나타나는 검은 두타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검은 산' '검은 산' '검은 산' 하며 중얼거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이 '검은 산'이 나의 정신의 어둠에 직접 관계되는 것은 그러나 훗날이었으니 해남 시절 인근의 옛 포구였던 백포(白浦) 또는 백방포(白房浦)의 '흰 방'과 '흰 산'과 '흰 마을'을 슬픈 마음으로 보고 난 뒤였다.

아아!

산천도 인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고 죽임을 죽어 검고 희게 표상하니 산천에도 죽임과 살해와 외로움과 한(恨)스러움의 무늬가 또한 따로이 있단 말인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강증산과 고판례보다 더 커다란 '천지굿'이 참으로 이 강토 위 곳곳에 거의 매일 밤 매일 낮으로까지 열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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