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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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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6>

번뇌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의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밤은 밤대로 끝없는 착종(錯綜)과 불면의 밤이었고 낮은 낮대로 공연히 들뜨는 환상과 흥분의 나날이었다. 눈만 뜨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좌불안석, 오라는 곳도 많고 갈곳도 많은 그런 날들이었다. 때론 소음이 음성으로 바뀌어 들리기도 하고 때론 대낮 천장 위에서 핏빛 댓이파리들의 무서운 춤을 보기도 했다.

번뇌였다.

하루는 밤이 새도록 동쪽 창문에 흘러드는 푸른 달빛 밑에 앉아 커다란 적막 속에서 일초일초 옮겨가는 시계의 시퍼런 초침에 묶여 꼼짝달싹을 못하고 앉아 있기도 했다.

번뇌였다.

나는 그동안 충북대학교 철학교수 윤구병 아우를 통해 소개받은, 브리태니커사전과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의 소개로 전남 승주군 선암사(仙巖寺)에 방을 하나 빌렸다.

감옥에서 중단한 참선을 계속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그것보다는 우선 급한 것이 불면과 환상으로 범벅이 된 나의 심상치않은 번뇌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다. 급했다. 그래,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느날 아침 간단한 짐을 챙겨들고 문득 집을 나서는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아내였다. 자기를 죽이고 가라는 거였다. 자기가 죽지 않는 한은 못 가게 막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거였다.

"나 머리 깎으려는게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잠시 마음을 달래고 좌선 좀 하자는 건데……."

"안돼요. 나를 죽이고 가세요."

"아니, 왜 그렇게 과격한가? 별 것 아닌 일 갖고서……."

"가면 당신 죽어요!"

"어?……"

"장준하 씨가 어떻게 죽었어요? 후미진 산중에서 밀어버린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나도?……"

"그래요. 당신 극우파와 극좌파 양쪽에서 극도로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해요. 목적은 둘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똑같이 죽이고 싶어해요."

"에이 설마!……"

"당신은 당신의 위상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모르고 있어요. 당신 충분히 죽일 이유가 있어요. 그걸 왜 몰라요?"

"장준하…… 장준하…… 그 흰 모래밭에 쓰러진 청년 장준하라…… ."

나는 점차 아내의 주장을 납득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이 너무나 컸다. 광주사태를 보라! 군사화, 유니폼화 하고 있는 좌익운동을 보라!

이상한 일은 이때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짐을 방구석에 내던지고 그 길로 잠에 빠져 며칠을 내리 잤는지 모른다. 그 바람에 한창기 사장과 선암사의 지허(指墟)스님께는 큰 결례를 하게 되었으니 요 얼마전 아내와 함께 선암사에 갔을 때 지허스님과 옛얘기로 그때를 추억하며 웃던 날 밤, 전에 소설가 송기숙 씨가 머물러 작품을 쓰던 숙소인 해천당(海川堂) 좁은 방안의 내 마음 깊숙한 저 안에서부터 문 두드리는 소리,.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아!'

그렇다.

여기는 어둡구나!

그랬다.

그 한없이 아기자기한 사찰의 옛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빼어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때의 번뇌는 칼을 품고 있었다.

그러기에 천장에서 피로 그린 댓이파리가 춤을 추었던 것 아닌가! 자꾸만 자꾸만 감방안에 아직도 갇혀있는 나의 외로움 위에 산천이 무너지고 노을이, 죽음의 노을이 비껴 무슨 해일 같은 것에 휩쓸려 사라지곤 하던 것이었다. 끝없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시달리며 시달리며 시달리며…….

가네
천장엔
붉은 댓이파리
날카로운 비명 아련히
식은 땀 속에 식은 땀 속에 사라지는
잠에서 깨어난 오후
문득 일어나 가네
천장엔
붉은 댓이파리
문들 모두 열려 있고 문 두드리는 소리
빈 방을 나와 빈 복도를 또 지나나와
빈 철문 열린 비탈길 내려
저 먼 텅빈 하늘에 문 두드리는 소리
가네
천장엔
붉은 댓이파리
노을은 붉은 댓이파리로 타오르고
빈 하늘에 빈 하늘에
손이 하나 나를 부르고
산은 쪼개지고 거리는 무너지고
피는 흐르고 바다는 열리고
가네
천장엔
붉은 댓이파리
문득 일어나 노을 타는 바다
혼자서 가네 저 머나먼 바다
손이 하나 나를 부르고
나 혼자서
가네
가네
저만큼서 나를 부르는
자꾸만 부르는
애린의

피묻은 흰 손.

애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누구인지 모른다. 웬 여인이 죽어가며 손짓을 하던 거였으니. 그 손! 피묻은 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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