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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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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5>

생명사상 세미나

천주교 원주교구엔 사회운동을 위한 교육센터가 있다. 봉산동 소재 봉산 밑 고즈넉한 자리에 있는 2층건물이다. 그 자리에서 나 출옥후 얼마 안 되었을 때 장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박재일 형과 내가 나서서 '생명사상 세미나'를 기획했다.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 내 기억에는 개신교쪽에서 아무개 목사와 황인성 아우, 나상기 아우, 그리고 가톨릭쪽에서는 정호경 신부와 고 제정구 씨 등이다.

날카롭게 기억하는 한 사건이 있다.

한창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개 목사와 황인성, 나상기 등 개신교쪽 사람들 여럿이 밖으로 나가 마당 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의논하더니 들어와 앉자마자 우선 아무개 목사가 목청을 높여 가라사대

"나는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김지하 시인이 감옥에서 나온 뒤 꺼낸 것인 모양인데 혹시 김시인이 더는 감옥에 가서 고통받기가 겁나니까 애매한 주위 사람들을 끌여들여 생명사상이니 뭐니 하고 나팔 불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진실이 뭡니까? 우리가 지금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은 5공타도뿐입니다."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무개는 막무가내로 나에 대해서, 그리고 원주사람들에 대해서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자리에 앉은 채로 목소리를 높여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빈민운동가이며 개혁정치가인 제정구 씨다.

<사진: 제정구>

"아니, 크리스챤 성직자란 사람이 대놓고 생명이니 나팔이니라니? 성경을 읽은 거요? 안 읽은 거요? 아무개는 성직자요, 아니면 직업혁명가요?

나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 꼭 자본론만이 필요하다고 생각 안합니다. 자본론 따위를 안 읽고도 생명이란 화두 하나로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꿰뚫어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행동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도대체 성직자란 사람이, 그리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이 그게 무슨 말투요? 아니, 김지하란 사람에게 그따위 말을 함부로 할 자격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다는 거요? 사과하시오, 지금!"

정호경 신부의 찬성발언이 이어졌다.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사회를 맡은 박재일 형이 무마하고 나서서 일은 그쯤에서 유야무야되었다.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아 목사가 나를 비난하고 제정구 씨가 내 편을 들어서가 아니다. '생명'이란 말 한마디를 화두로 해서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꿰뚫어 알고 세상 바꾸는 데에 앞장설 수 있다는 그 도도한 발언이 나를 울린 것이다.

그렇다.

생명은 새 시대의 화두였다.

그 뒤 몇 해 후던가 제정구 씨와 나는 생명사상을 연구 토론하는 일종의 현인회의(賢人會議)인 '사발모임'을 시작해서 한동안 줄기차게 진행한 일이 있다.

정호경 신부, 이현주 목사, 현기 스님, 신홍범 형과 장회익 교수 등이었다. 나는 몸이 아파 깊은 혼몽속을 헤매고 있을 때라 모든 일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진행을 제정구 씨에게 맡겼다.

제정구 씨는 만날 때마다 자기의 묵상 결과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 한동안 그는 나의 훌륭한 생명스승이었다.

"생명의 메시지는 과학을 대신해서 미래세계를 이끌고 가는 새 척도가 됩니다."

"미래의 세계문명은 바로 생명의 문명이 될 것입니다."

"동·서양 사상의 만남, 유불선과 그리스도교의 융합의 초점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완전히 실현한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요 신선입니다."

"생명이라는 척도 위에서 한민족의 전통이 하느님의 가장 귀한 영성과 하나가 됩니다."

"앞으로의 민중운동의 대명제는 생명밖에 없습니다."

이밖에도 쉼없이 많은 귀한 묵상의 결론들을 내게 들려준 이가 또한 제정구 씨이다.

그렇다.

그의 예견은 적중하였다.

오늘 어떤가?

입 달리고 코 달리고 귀 달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입만 벌리면 '생명'이요 '환경' 타령이요, '생태학' 자랑이다.

그러나 제정구 씨는 악다구리 같은 정치판에서 그 시커먼 탁류(濁流)를 개혁하려고 애쓰다 그만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제 그 누가 있어 보다 더 심오한 생명운동을, 우리의 발걸음 발걸음을 자기의 묵상을 통해 공감하고 발전시키고 또 지지해줄 것인가?

아아 생명!

그것은 제정구 씨의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역사를 알고 사회를 꿰뚫으며 사람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지혜와 용기의 샘물을 발견한 사람은 나도 그 누구도 아닌 제정구 씨였으니 하느님은 아끼는 사람을 일찍 데려간다 하던가? 아깝고 아깝고 또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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