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한 관심은 동학에 대한 관심을, 동학에 대한 관심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끌고 들어왔다. 동학은 생명사상이었다. '모심' 곧 '시(侍)' 한 자야말로 천지만물의 생존의 비밀이었다. 우리는 모두 '모심으로써 살아 있다' '우리는 생명을 모심으로써 생존한다'.
생명론이 박제일 형에게서 유기농운동과 무공해농산품 수요라는 구체적 안건을 끌고나왔듯이 최열(崔洌) 아우에게서는 생명론에 토대한 환경운동의 전개를 끌어내었고 또한 동학론은 장선생님에게서 어릴적 친구인 천도교의 오창세(吳昌世) 선생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끌고나왔다.
우리는 생명과 동학이라는 새로운 기준 위에서 동학과 서학, 생명론과 변혁론, 구조모순과 환경오염 문제의 보합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눈 달리고 입 달린 사람은 모두 다 환경이요 생태학이요 생명타령이며 지각있고 역사를 안다는 사람은 모두 다 동학이요 모심이요 해월 선생 타령이지만 그 무렵 지식인 사회와 운동권은 이 두 가지 담론에 대해 즉각적으로 변절, 배신, 전열이탈, 전열혼란과 반동으로 몰아세웠고 심지어 혹세무민이라는 고색창연한 모략중상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때마다 '시간이 약이다! 10년 후에 보자!'고 했었다. 과연 10년이 지났을 때 어떠했던가? 20년이 지난 오늘은 또 어떠한가?
나는 지금도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완전히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부분적으로 쓸모가 있다. 자유자본주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 차원, 신기원 위에 서서 그 두 개의 옛 차원에 대해서 내리는 여유로운 판단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장선생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이 또한 동학과 생명론이었다. 원주캠프는 겉으로 보아 전혀 다름이 없었고 사회개발위원회 활동은 여전했지만 내실은 이미 그 중심이 바뀌어버렸다. 차원변화였다. 따라서 새로운 상비(賞非, 과거를 개혁함)와 새로운 학습(새 차원에의 적응)이 필요한 때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많은 속앓이를 겪어야만 되었다. 괴로웠지만 우리는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나 '그레고리 베이트슨' 등에게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해명을 얻을 수 있었다. 생명이 생명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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