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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2ㆍ제3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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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2ㆍ제3부 시작>

감시

출옥한 날부터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도리어 감시가 강화되어서다. 한밤 우리집 건너 공터에는 항상 검은 지프차가 한 대 머물고 있었다. 그 사정을 담은 〈한밤〉이라는 시가 시집 안에 남아 있다.

판장문 너머 둔덕 아래서 밤새
검은 지프 한 대 불빛 깜박임
판장문 너머 둘 혹은 셋씩 그림자들 밤새
몰켜섰다 흩어졌다 두새거리는 소리
뒤꼍 어덩 위
은사시나무숲 휩쓰는 밤바람
잿빛하늘 낮게 흐르는 구름 함께
새끼염소들 꿈길 함께
뒤꼍 어덩 위
그 위쪽 흙버덩 위
외딴 목맨 집 그 뒤꼍
후미진 방공호터 가녘 측백나무 그늘 언저리
마른 번개 함께 찢어지는 비명 함께
혀 빼물고 늘어지는 여자
그 옛 죽음
내 죽음

한밤
잠 못 이루는 기인 긴 밤
판장문 너머 둔덕 아래서 밤새
검은 지프 한 대 불빛 깜박임
판장문 너머 둘 혹은 셋씩 그림자들 밤새
몰켜섰다 흩어졌다 두새거리는 소리.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정보부 원주 분실에 정보를 전하는 안테나들이 있고 다방, 술집, 성당과 사회개발위원회 사무실에도 각기 자기 나름의 독특한 정보창구가 있어서 몇시 몇분에 김아무개가 박아무개와 어디서 만나 무얼 했다는 정보가 싸그리 전달되었으니 가는 곳이 곧 문세광의 방이요 앉는 곳이 바로 서대문감옥이었다.

그렇다면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이외에 석방의 뜻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광주사태 이후의 세상은 흉흉하고 살벌했다. 도처에 타다 남은 불씨들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원한은 깊이깊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런 중에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가 주는 '로터스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웬 사람이 전보를 쳤다. 축하가 아니라 저주였다.

"모두들 죽임당하는데 너 혼자 상을 받다니 염치가 있느냐?"는 거였다. 전보를 읽으며 나의 한도 깊이깊이 내면화되었다.

나는 끄떡도 않고 상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수상소감에서 새로운 각오를 밝힐 것이었다. 수상소감의 제목은 '창조적 통일을 위하여'로 벗들에 의해 명명되었고 그 내용은 제3세계와 함께 우리가 새롭게 내딛어야 할 생명운동의 발걸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의 생명운동 제안은 사실상 그날의 원주 가톨릭센터 2층 수상식장에서였다. 명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적 흐름은 그러했다.

그날을 전후해서 나는 장일순 선생님과 방향전환에 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간 자호(自號)를 청강(靑江)에서 무위당(无爲堂)으로 바꾸어 쓰고 있었다. 청강과 같은 폭넓은 일방적 적극성에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없음' 즉 '무위 무불위(无爲 无不爲)'라는 '수동적 적극성'으로 후퇴한 것이다. 선생님은 아주 개량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대중적 민중운동의 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공세에서부터는 일단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왜?

물론 정세 전반에 대한 판단 때문이다. 적아간(敵我間)의 관계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적(敵)과 아(我)의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전과는 다른 철학적 태도에서 새출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선 5공은 불교사찰 난입 등을 비롯, 각 방면에서 무자비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군사작전이었다. 본디 이 따위 공세에는 저항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5공은 또 끈질긴 회유작전도 병행하고 있었다.

원주 외곽에 있는 제1군, 야전군사령부의 사령관으로부터 소장 참모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 대한 회유작전에 모조리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 앞에 수십 명의 가톨릭장교단을 앞세우고 그 중심에는 야전사령부의 군종신부를 세웠다.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밤새워 우주의 시원에 관해 토론하고 또 신학교까지 찾아간 적이 있었던 김육웅 가리누스 신부가 바로 그였다.

장선생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에게도 대령들이 자주 찾아오고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이제 다시 행동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구할 수가 없다" 이런 거였다.

그들이 언제 나를 구하려 했다는건가?

처음엔 우습게 듣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안사가 박준광 씨를 감옥속의 내게 보낼 때 이미 지주교님과 장선생님께는 야전사의 일선 장교들을 앞세워 여러 가지 교섭을 했었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또 사실확인도 했다.

우리는 운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것은 싸움에서 가장 나쁜 상태, 즉 '피동(passive)'에 빠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근본을 뒤집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념 위에서 방향, 방법,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그 '피동'을 유지하며 국면 국면의 특성을 따라가는 '수동적 적극성' 즉 '솔라 페시브(solar passive)'가 좋다.

장선생님과 연락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제자인 재일(在日)의 제3세력 지도자 한 분의 존재가 저들 정보선상에 떠오르고, '원주캠프'를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장선생님의 옛 참모 한 사람이 5공진영의 중요한 부분에 떠올라온 것이다. 생각에 따라서 그것은 일대 위기였다. 우리는 칼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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