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어느날이다.
내가 잘 아는 교도관 간부 한 사람이 새벽녘에 왔다. 내 방문 앞에 우뚝 서서 아무 말이 없었다.
“웬일이셔? 이 새벽에?”
그는 울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죽이고 울고 있었다.
“웬일이야, 응?”
그의 입에서 조용조용히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광주 5월’에 관한 것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개처럼 끌려갔다는 것. 시민들은 도청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벌였다는 것. 미군은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북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지역의 호응도 없고 광주와 인근 전라도만 고립무원으로 갇혀 있다는 것. 한술 더 떠 영남 지역에서는 광주에서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니 다 죽여야 한다는 공론이 돌았다는 것.
이어서 그는 구슬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가 잘 가는 요 앞 중국집이 있어요. 그 집 ‘보이’ 한 아이가 광주아이인데 어제 만났는데 얼굴이 새하얗게 돼가지고 광주에 죽으러 간다고, 고향에 가서 싸우다 총 맞아 죽겠다고…. 그리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는데…. 신문 보도도 통제되거나, 보도되어도 일방적입니다. 폭도라고 나와요. 김대중 씨와 그 일행들도 다 잡혀 갔지요. 광주에는 특수전단이 들어가… 막 잡아 죽이고, 이상한 약들을 먹고는 아무나 닥치는 대로 쏘아 죽이고…. 흑흑흑, 김선생! 이것을 어떡하면 좋지요? 어떡해야 합니까.”
그는 전라도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랬다.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원한이, 시뻘건 핏빛 같은 원한이 내 가슴에 가득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 이튿날 밤, 다시 그 다음 사흘째 되는 밤, 도통 잠을 자지 못했다. 정신은 마알갛게 멀쩡한데도 텅 비어 있고 가슴만 피가 끓어 시뻘건 더운 피가 끓어…. 나는 생각했다.
“전라도의 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라도의 한은 이 민족 전체의 한을 압축한다. 이것은 복수나 단순한 해원(解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전라도 사람과 민족, 민중이 주축이 되어 참다운 이상사회, 새로운 통일사회를 건설하는 것만이 그 한을 진정으로 푸는 길이다. 단순한 정권 차원의 해소로도 안 된다. 그것은 아마도 전(前)문명사적인 것이다. 미국과 북한이 침묵하며 방관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상과 역사의 새 차원, 그야말로 신기원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학 등 전라도의 항쟁사가 현대에 갖는 참다운 의미를 생각할 때다. 전라도 민중의 내면적 한의 생성을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복수나 해소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 그것. 그것을 위해 이제 나는 방향을 바꾼다. 전혀 새로운 길을 떠난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고 가로막지도 못할 것이다.
<사진>
아, 내 고향!
저주받은 땅 전라도!”
사흘을 넘기고 나서 나는 길고 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점호나 시찰할 때도 앉아서 잤다. 눈을 뜨고도 잤다. 나는 거의 죽은 것 같았다. 참선할 때의 그 시커먼 뻘구덩이들, 꺼뭇꺼뭇한 돌담부락들이 보이고 ‘모로 누운 돌부처’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흰빛과 검검한 돌빛이 섞인 기이한, 기이한 저녁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꼭 참선 같았다. 그 뒤, 다시 보이는 ‘모로 누운 돌부처’ 그리고 부처가 누워 있는 보리밭 위의 저녁 하늘만 푸르고 또 짙푸르렀다.
며칠이 지나 계속 들려오는 광주 소식을 이제는 아주 냉정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내 나름의 셈(算)은 끝났다. 좀더 뜸을 들이고 조건을 좋게 하여 조영래 아우를 확실히 구원할 때까지 각서를 유보하다 적절한 시기에 가서 나간다.
나는 병사의 그 누구와도, 접견 온 가족과도, 변호사와도 말을 잘 안 했다. 무거운 짐 1,000근을 메고 팍팍한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광주 5월! 그것은 또 하나의 6·25였다. 말을 안 하는 대신 책을 읽는 틈과 틈 사이에 가끔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부용산’이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새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몇 달이 지났던가. 박준광 씨가 다시 내게 오기 시작했다. 2차, 3차, 4차씩 또 오고 또 왔다. 조영래 아우를 구하겠다는 깊은 우정과 보안사 간부들의 지시가 맞아떨어지는 그 지점에 그의 성실성이 더해진 것이다. 원주의 집에 가 가족도 만난 모양이고, 우리 원보와도 함께 놀았다고 한다. 지주교님의 말씀도 전해 주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 그만 나오라’는 것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각서는 더 못 쓰는 것이었으니 내가 당당하게 내 소신을, 그야말로 안팎이 동일한 내 신념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유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박준광 씨가 소신대로 아무 것이나 써도 좋다고까지 말했고, 또 하루는 남영동의 경찰 대공과에서 나와 조영래 관계 사건을 재수사하고 새로운 진술서를 내 의견 그대로 받아갔다.
나는 이미 결심했다.
현 수준의 투쟁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나의 길은 따로 있었다.
그 무렵 지주교님이 친히 접견오셨다.
“정세가 많이 바뀌었어. 이제는 나올 때가 됐네. 나와서 다시 보고 다시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야. 꼬마는 잘 있어. 영세받았다네.”
그날밤 드디어 칼을 내렸다.
각서를 쓰기로 한 것이다.
나의 각서는 주먹만한 한 글자 한 글자로 장자(莊子)의 ‘응제왕편’(應帝王篇)의 인용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뜻은 이렇다.
‘내가 지금 조물주를 벗삼다 싫어져 또 허무의 기운을 타고 태극(太極) 밖에 내달아 우주를 들며나며 태허(太虛)의 광야에서 노닐고 있는데 네가 지금 나에게 와서 옹색스럽게 천하 다스리는 정치 따위 문제로 나를 괴롭힌다는 말이냐?’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그때 중앙정보부 전두환 부장의 브레인으로 저 유명한 허문도(許文道) 씨가 있었다고 한다. 내 각서는 곧 허씨의 손으로 넘어가 당장 합격돼서 즉각 석방이 결정되었다 한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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