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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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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8>

병사에서 3

3월1일.

‘서울의 봄’이 왔다.

구속되었거나 계류중이던 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나만 남았다. 까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또 다시 도전할 놈’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날개 달린 컴퓨터’라는 거였다.

서운했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밥도 제대로 먹고 운동시간도 한 시간으로 늘어났으며 책은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되니 살맛이 나던 차였다. 못 나간들 어떠랴? 내일 먹을 새 샘물을 장만하리라! 우선 벽면증(壁面症)이 씻은 듯 사라지고 생명의 에코로부터 시작된 동양의 생생화화 사상과 서양의 생태학에 관한 관심 및 독서로 나의 넋은 참으로 바쁘고 또 바빴으니 감옥이 바로 광장이요, 창문이 곧 화면(畵面)이었다. 머리 속에서는 문득문득 시를 써서 외웠으니 걸작은 아니더라도 시경(詩境)은 유지할 수 있었다.

흰 벽 위에 지두(指頭)로 눌러 싯귀를 쓰고 창밖 인왕산쪽으로 자그맣게 싯귀를 외워 나의 시들을 허공에 새기었다.

서울의 봄에 대한 느낌 한 가지를 담은 ‘소식’.

‘자네 언 똥구멍에 매화 피었다는 한 소식.’

독재자가 죽기 직전의 그 수상한 날들을 담은 ‘어느 한 날’.

쇠창살 너머 방안으로
구더기가 기어오고
바람이 오고 큰 비가 오고
소문, 소문, 소문이 오고
휘몰이, 휘몰이 발들이 오고
와서 내 앞에 온종일 난무하고
잎 위에 잎그늘
흰모래 위에 빠른 새그늘
1979년 10월 초순 빛 밝은
어느 한 날 오후.


참선과 벽면증의 고통이 뒤범벅이던 한때의 심경을 담은 ‘면벽’.

그리움 끊고
간도 꺼내 던지고
쓸개도 멀리 버리고
그래도 조금은 미련이 남고
그래도 조금은 노여움이 남고
금잔화 눈부신 아침 빛무리
빛무리에 눈멀어 닷새째던가
일주일째던가 아니면
한 보름째던가, 그래도 끝끝내
날짜 세고 있는 지금이.


‘요가’를 하며 읊은 근원적 반역의 시, ‘물구나무’.

감옥이라도 하늘만은 막지 못해
밤마다 두견새 와서 울고
시간이 무너진 자리
귀틀상자에도 봄이 와
하얀 민들레 씨 가득히 날아든단다
사람이 그만 못하랴
이 봄엔 물구나무를 서겠다.
몇차례고 어디서고
빼앗긴 봄날엔 웃어 물구나무를 서겠다.
지구를 받쳐들고
두견새 소리 맞춰 굿거리 장단으로
창공에서 한바탕 발춤추어 볼란다
구경오너라
애린
웃지는 말고 애린
오늘밤 나는 화성에서 잔다.


‘애린’이 나왔다. 애린은 나의 오랜 수형생활에서 생겨난 ‘결핍’의 대안이었으니, 그것은 우선 감각에서부터였다.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쌌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동그래져
애린
네 얼굴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부드러워져
애린
네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해맑아져
애린
그러나 이제
아무리 부르려 해도
아무리 아무리 그리려 해도
떠올리려 해도

안돼
그게 안돼
모두 다 잘 안돼
쥐었다 폈다
두 손을 온종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쌌는 건
알겠니
애린.

애기들 ‘쥐암 쥐암’ 하듯 그렇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세월이 또 흘러 사월 초파일이 되었다. 마주 보이는 인왕산에는 온통 연등이었으니 그때의 초파일 밤, 그 휘황한 불빛을 영영 잊을 수 없다.

꽃같네요
꽃밭같네요
물기어린 눈에는 이승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간다면 살아 못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 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같네요
참말 꽃밭같네요.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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